낯선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미덕

그러니까, 지난 몇 개월, 이 글의 연재가 10회를 넘어서며 문득 (어쩌면 새삼 혹은 재차) 깨닫게 된 일이다. 어떤 한 사람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 사람의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

물론 이 말은 무척이나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와 ‘방식’을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카프카에 대해서는 카프카 식(式)으로 말하고,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 식(式)으로 말할 것.

요는 찰리 채플린을 왕가위 식으로 말한다거나, 비틀즈를 브리트니 스피어스 식으로 말한다거나, 전두환을 체 게바라 식으로 말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혹여 그것이 실험적인 시도로 (좋게 말해) 신선한 발상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할지라도, 역시 대상을 최대한 ‘온전히’ 표현하라는 본령에는 위배되는 일이다.

서태지는 서태지 식으로 말해야 하며, 반 고흐는 반 고흐 식으로 말해야 한다. 바람직한 텍스트의 경우, 내용과 형식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결정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간과할 수 없는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나(필자 혹은 화자)의 관점(프레임 혹은 필터)이다.

유난히 ‘그의 방식’에 집중해야 하는 소설가를 만났다. 물론 그가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짐짓 그것에 대해 무신경하기까지 하다. 소설가 정영문 - 이 글을 위해서는 그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라고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결코 그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가장 최근 소설집인 <달에 홀린 광대>에는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도, 저자의 ‘작가의 말’도 빠져 있다. 그가 그것을 간절히 원하거나 특별히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하여 이 글은 그의 소설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숲’의 이미지를 닮게 될 듯하다.

“결국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지팡이를 짚은 채로, 아니, 짚기보다는 그냥 든 채로, 숲속에서는 흔히 길을 잃게 되지, 그리고 숲은 길을 잃기에 좋은 곳이지, 하고 생각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그런 생각이라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어느 점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곳이 숲속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고, 다만 약간 우습게 생각되었다. / 그래서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도 했다. 나는, 더 이상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길을 찾게 되거나 못 찾게 되겠지. 길을 못 찾게 되지 않는다면 찾게 되겠지. 나는 그밖에, 생각에 기대어 할 수 있는 몇 가지 생각을 더 했다.” ( - 정영문의 단편소설 ‘숲에서 길을 잃다’ 중에서)

소설가 정영문의 집 근처, 약속장소인 카페의 문 앞에는 휴업을 알리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사방 백 미터 안에 다른 카페 네 곳이 있었고, 약속 시간까지는 7분이 남아 있었다.

‘네 곳 중 어느 카페로 약속장소를 옮길까’ - 문득 정영문의 소설에서라면 등장인물이 그것을 결정하는 과정만으로도 무리 없이 다섯 페이지쯤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카페 <라리>의 메뉴판에는 ‘아메리칸 커피’와 ‘카페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지금껏 적어도 수백 번쯤 카페의 메뉴판을 들여다보았을 것인데, 아메리칸 커피와 카페 아메리카노를 구분해서 따로 표기해 둔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두 커피의 차이점을 흰 와이셔츠에 검은 에이프런을 두른 종업원에게 물었다. 종업원의 설명은 상냥하고 상세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분명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카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두 커피의 차이점이 기억나지 않는다.

테이블 맞은편의 소설가 정영문이 짧게 말했다.

“여긴, 스트롱 커피.”

이것을 끝으로 더 이상 이 글에서 그의 말을 직접 대화체로 인용하지 않기로 한다. 대화를 나눌 때의 그의 목소리, 표정, 자세, 특유의 아우라를, 즉 예의 ‘그의 방식’을 대화체만으로 전달하는 것이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커피는 맛있었지만, 대단히 맛있지는 않았다. (정영문의 소설에 이런 식의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스트롱 커피의 맛은 어떨까 궁금했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자꾸 사용하다 보면 꽤나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문장 형식이다.)

커피. 두어 시간 남짓 그는 두 차례 커피 리필을 부탁했다. 나도 두 번 리필을 하고 싶었지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한 번으로 그쳤다. 그러나 커피를 한 잔만 리필 했기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불면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밤마다 오랫동안 몸을 뒤척였는데 그럴 때면 영원히 잠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어떻게든 잠을 자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것으로 보냈다.”( - 단편소설 ‘달에 홀린 광대’ 중에서) 지난 몇 년 간 정영문과의 짧은 만남이 띄엄띄엄 이어졌지만, 함께 커피를 마시며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불면증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나처럼 불면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럼에도 커피를 멀리 하지 못하는 것 역시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부터 들었다. 그는 말보로 레드를 여러 대 피웠다.

‘번역가’ 정영문의 입지는 굳건하다. 작업량도 상당하다. 지난 10여 년 간 그는 50여 권에 이르는 책을 번역했다.

같은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소설을 발표한 것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유자적 자신만의 리듬으로 일상을 소요할 것 같은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사실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생활인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의 번역작업이 자신의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을지언정, 결코 큰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번역은 그저 ‘생활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번역이란 글쓰기와 소설 창작이란 글쓰기가 너무나도 다른 것임을 강조했다. 번역과 창작 - 아메리칸 커피와 카페 아메리카노의 차이 정도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차원의 글쓰기.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겹겹 봉오리처럼 둘러싸인 말(言)의 존재 방식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내가 한 얘기가 사실인지 자문해본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사실만을 말하는 데 흥미를 잃었으며, 또한 내게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 간의 차이란 없다.” ( - 단편소설 ‘산책’ 중)

그가 ‘전환점’이란 식상한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작가로서 분명한 전환점을 맞은 듯 했다.

그 전환점의 시작은 내년 영국행을 통해 구체화될 예정이었다. 정영문은 한동안 영국에 장기체류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번역 작업과 소설 창작을 시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생활의 방편’이 아닌 번역, 본격적으로 자신의 소설과 한국의 몇몇 소설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숲은 어떤 난맥상의 느낌을 주었다.

대체로 정돈된 느낌을 주는 바다에 비해 내가 숲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 단편소설 ‘숲에서 길을 잃다’ 중에서)

그와의 대화는 예의 ‘난맥상’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자연에 대한 원체험을 간직하고 있다는 어린 시절, ‘도저히’나 ‘도무지’ 등의 수식어를 동원할 수밖에 없던 대학시절, 무용한 실존 혹은 실존의 무용함으로 기억되는 프랑스 체류시절.

그러나 시시콜콜 자기연민 가득한 구체적인 무용담을 들려주지는 않는다. 그는 국적이나 지방색, 관습이나 세대와는 상당히 무관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유쾌한 부조리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가 최근 경험한 가장 어이없던 일 중에 하나는 집 근처 대학 캠퍼스를 산책하던 중 겪었던 일. 마침 점심시간 무렵 스피커에서는 교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대학교의 교내 방송 뉴스에서 ‘오늘의 주식시황’을 상세히 알려주더라는 것.

“어쩐지 당신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하나도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아.” / 나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조금 전 내가 한 얘기를 생각해본다. 그 얘기를 하고 나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 “그리고 당신의 얘기는 주제가 없어.” B가 말한다. /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니까.” /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한에서 당신은 누구보다도 이야기를 잘해.” ( - 단편소설 ‘산책’ 중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 천재라고 생각하는 데라야마 슈지,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해보려고 부단히 기울였다는 노력, 그러나 결국은 그럴 수 없더라는 결론, 최근에 그 요리법을 마스터했다는 ‘장어국’과 ‘고동국’, 상당한 솜씨의 요리 실력, ‘예전엔 시를 많이 읽었었는데, 요즘은 별로.’라는 공감, 카프카의 아름다운 엽편소설들, 아름답기보다는 강박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카프카의 편지들,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 가끔 그립지만 기르던 당시에는 종종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는 고양이, 잠이 오지 않을 때 아주 가끔 켜 본다는 티브이......

그의 어느 소설은 “내가 집을 나서기로 결심을 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끝난다. 정영문은 단연코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이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 소설가 정영문

1965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작가세계>에 장편 <겨우 존재하는 인간>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꿈>, <달에 홀린 광대>, 중편소설 <하품>, <중얼거리다>, 장편소설 <핏기 없는 독백>을 출간했으며, <쇼샤>,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 <인간들이 모르는 개들의 삶>,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등 50여 권의 외서를 번역했다.

제12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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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