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한 연쇄살인을 통해본 암흑기 미국의 일그러진 초상실화를 영화로 옮긴 '미국판 살인의 추억'… 사실을 집요하게 쫓는 거장의 집념 돋보여

연쇄살인은 영화의 단골 이야깃감이었다.

소재의 특성상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들이 특히 많았는데, 전설적인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의 실화를 영화로 옮긴 <프롬 헬>이나 헨리 리 루카스와 오티스 짝패 연쇄살인범의 실화에 근거한 <헨리: 연쇄살인자의 초상>,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등이 모두 실제 사건에 기초한 이야기들이었다.

연쇄살인 장르에 실화가 많은 이유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드러내는 이 같은 사건들이 모두 실제로 벌어졌다는 데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실제효과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잔악무도한 범죄와 대범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범인, 게임을 하듯 살인 행각에 몰두하는 범행의 형태 등이 극적 영화의 소재로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 역시 이 같은 연쇄살인 장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세븐>에서 이미 동종의 소재를 다루었던 핀처는 미제 사건으로 남은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를 통해 암울했던 시대의 일그러진 초상을 그린다.

■ 내 살인을 남에게 알리라

<조디악>의 모델이 됐던 조디악 킬러 사건은 실은 데이빗 핀처의 출세작인 <세븐>의 모티프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조디악 킬러의 사연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강렬하게 이 이야기에 이끌렸다는 핀처는 방대한 자료조사와 탐문을 바탕으로 '특정 시대의 살인에 대한 거대한 해부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제목으로 쓰이고 있는 조디악의 뜻은 12개 별자리를 의미한다.

1968년 최초 살인으로 시작해 수 차례 연쇄살인을 저질렀으나 여전히 검거되지 않은 미제 사건의 범인을 뜻하는 말이다. <조디악>은 무려 20여년 간 이어진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기록을 더듬듯 꼼꼼히 따라간다.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1969년. 한 쌍의 남녀가 유유히 차를 몰아 호젓한 공터에 도착한다. 척 보기에도 부적절한 관계인 두 사람은 이내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당한다. 남자는 살았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서 온 몸에 구멍이 뚫려 즉사한다.

사건 직후 샌프란시스코 지역 3개 신문사에 괴편지가 배달된다. 편집장 앞으로 배달된 편지에는 자신이 살인범이며 비슷한 시기에 저질러진 살인사건들도 자신의 소행임을 주장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살인자의 요구는 동봉한 암호문을 신문 1면에 공개하라는 것. 전문가들이 암호해독에 동원되고 어느 교사 부부에 의해 암호는 풀리지만 살인은 계속된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 폴 에이브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샌프란시스코 경찰청 강력계 경위 데이빗 토스키(마크 러팔로)는 조디악 킬러 사건을 추적하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하고 두 사람 모두 망가지거나 경찰 옷을 벗는다.

하지만 이들의 추적을 지켜보던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는 이 미제 사건의 끝을 보려한다.

킬러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수십년 간의 집념의 추적이 이어진다.

<조디악>은 연쇄살인 장르지만 스릴러의 쾌감을 극대화하는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20여 년간 이어지는 추적은 어떤 뚜렷한 결론으로 귀착되지 않고 미진한 채 끝나 버린다.

범인의 존재를 암시하는 장면은 있지만 핀처는 속시원히 조디악에 대한 의문증을 풀어주지 않는다. 실제 사건이 그러했으므로 결론을 지을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폴 에이브리, 데이빗 토스키,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로 이어지는 추적의 과정은 박진감 보다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다. 주인공들을 따라가며 킬러를 쫓던 관객들은 몇 차례 헛다리짚기를 거듭하면서 피로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느리고 장중한 호흡의 영화가 <세븐> <파이트 클럽> <패닉 룸> 등 전작을 통해 현란한 테크니션으로서 재주를 과시한 데이빗 핀처의 작품이라는 것도 의외 중의 의외다.

■ 시대의 공기를 담은 사건들

데이빗 핀처는 196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미국 사회의 풍경을 시각화하기 위해 바이퍼카메라라는 새로운 장비로 촬영을 했다. 최신식 HD 카메라인 바이퍼는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도 사용한 바 있는 첨단 기종이다.

박찬욱이 핀처의 <조디악> 현장에까지 찾아가 바이퍼의 성능을 확인하고 자신의 영화에도 활용했다. 채도는 낮지만 화면의 어두운 부분을 구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핀처가 바이퍼를 쓴 이유는 명백하다. 1960년대 말 미국 사회는 암흑기였다.

전쟁과 인종차별, 억압적 사회분위기가 팽배했고 워터게이트 같은 정치 스캔들로 바람잘 날이 없었다. 미국인들은 어디서도 희망을 찾기 힘들었다. 이 시기에 반전운동과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했다는 것은 그 만큼 시대의 공기가 무거웠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디악 킬러는 그런 사회분위기에서 활개를 쳤다. 언론과 공권력을 비웃으며 게임하듯 살인을 즐겼고, 잡을테면 잡아보라는 식으로 세상을 조롱했다. 대담한 조디악 킬러의 살인 게임은 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개봉 전부터 <조디악>이 <살인의 추억>과 비교된 것은 그것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외에도 이 같은 시대의 공기를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디악>이 단순한 연쇄살인 영화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현란한 기교와 스타일을 앞세운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얻은 데이빗 핀처는 이 영화에 이르러 대가다운 풍모를 드러낸다.

살인자를 보여주지 않고 그의 행위들만을 꼼꼼하게 쫓음으로서 공포스러운 시대의 얼굴을 그려내는 솜씨가 명불허전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