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 순종 즉위 100주년- 의친왕 손자 이혜원 씨 개인 소장 자료 공개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에 즉위식 기사 실려… 실질적 재임 3년, 열차로 부산· 함흥 등 순행

제복을 갖춰 입은 순종.
비운의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짧은 재위 기간 전국을 순행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최초로 공개됐다.

본지가 순종 즉위 100주년(8월27일)을 맞아 국립고궁박물관 이혜원(52) 연구원에게서 단독 입수한 사진들은 순종이 일제 강압을 받던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정에 역투했음을 시사한다. 이혜원 연구원은 순종의 동생인 의친왕의 손자로 이번에 공개한 사진은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자료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로 격하시키고 순종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낮추었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이왕직체제’다. 때문에 순종이 실질적으로 국왕 역할을 한 시기는 즉위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3년에 불과하다.

사료에 따르면 이 짧은 기간 순종은 주로 열차를 이용해 전국을 순행했다. 일종의 민정시찰이었던 것. 순종의 전국 순행에는 부산도 포함됐고, 부산에 기항한 일본군함에 올라가 선내를 둘러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연구원은 “순종의 전국 순행 때, 일본이 자국 군함을 부산항에 띄운 것은 자신들의 군사적 파워를 순종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며 “순종이 일본천황에게 ‘귀국에서 보내주신 함대 잘 관람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고 천황에게서 답신이 왔다는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고 설명했다.

순종의 순행은 개성, 의주, 함흥으로 이어졌다. 순종은 함흥에 들러 조선 창업기 태조의 즉위식이 거행됐던 함흥본궁(咸興本宮)도 둘러본다.

100년전 순종의 즉위식을 전한 당시 신문기사도 이번에 발견됐다. 황성신문은 1907년 8월 27일자 논설란에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내용의 사설을, 대한매일신보는 8월 29일자 잡보란에 돈덕전에서 즉위식 거행 기사를 다룬 것이 영인본을 통해 확인됐다.

사실 순종의 황제 즉위식과 관련해서는 지금껏 많은 미스터리가 남아있다.

순종이 부산에서 일본 군함을 시찰 할 때 모습. 일제는 순종이 부산에 도착하자 일본에서 들여온 군함 선상에서 만찬 축하연을 열었다.

즉위식 사진조차 아직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당시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폐위된 뒤 순종의 즉위를 결정한 터라 순종은 즉위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알려진다. 즉위식 관련 사료가 많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순종이 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했으며 순명비 민 씨(순종의 비(妃)로 순종 즉위 전 사망)를 순명효황후로 책봉했다는 정도로 다루어져 있다.

일각에서는 순종이 왕위 계승을 완강히 거부해 대리인이 즉위식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는 1907년 8월 4일자 1면 표지에 순종황제 즉위식 그림을 실었다(음력 기준 7월 20일에 즉위식 거행). 그림에는 순종황제 대신 어좌(御座)에 다른 대리인이 앉아있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당시 일제가 병력을 동원해 대리 즉위식을 강제 연출했다는 관측이다.

함흥 시찰 출발 때 모습. 순종은 함흥 본궁에 들 러 태조의 즉위 장소를 둘러봤다.

이 연구원은 “아버지인 고종이 살아 있지만 일본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왕좌를 물려 받은 거라 대리인이 즉위식을 대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1910년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창덕궁으로 간 순종은 이때부터 ‘은신의 세월’을 보낸다. 1926년 4월 25일 승하한 순종은 6월 10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경기도 유름에 순명효황후와 합폄(합장)했다.

당시 순종 장례식은 우리나라 국장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식행사에서 일본의 국장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출상(궁 밖으로 나와서 장지까지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예를 따르도록 일본이 묵인해줬다고 한다. 이를 ‘반차행렬’이라고 부른다.

“지금 한 병이 침중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1907년 8월 27일자 황성신문(왼쪽)과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국한문 혼용판. 황성신문의 경우 논설란에 순종 즉위 축하 내용을 실었고, 대한매일신보는 2면인‘잡보’란에 즉위에 관한 간단한 소식을 게재했다.
1907년 8월 27일자 황성신문(왼쪽)과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국한문 혼용판. 황성신문의 경우 논설란에 순종 즉위 축하 내용을 실었고, 대한매일신보는 2면인'잡보'란에 즉위에 관한 간단한 소식을 게재했다.

순종의 이 유언을 들은 것일까? 장례식을 마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의 대표자 박용규, 곽대형, 이광호, 이선호 등이 주도해 사림고보생 2만 4,000명을 동원해 태극기를 제작, 배포했다. 6.10만세 운동의 시작이다. 만세운동은 을지로, 종로 3가, 동대문, 청량리로 퍼져나갔다. 인산일 하루 동안 체포된 학생은 1천명에 달했다.

순정효황후의 가례식 사진도 공개

이혜원 연구원은 순정효황후의 가례식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순정효황후는 순명효황후 이후 책봉된 순종의 계비(繼妃)다.

906년 동궁 계비가 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비로 책봉됐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이라도 황후의 속치마를 볼 수는 없는 일. 이를 지켜본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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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