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코미디에서 초절정 리얼 액션까지 푸짐한 영화 성찬

연휴기간 극장 앞에 몰린 영화팬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비는 심정은 극장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가장 근심어린 한 해를 보내고 있는 한국영화계에도, 모처럼 맞은 외화 활황을 놓치기 싫은 외국영화시장에게도 추석은 중요한 시즌이다.

올해 추석 연휴 상영작들을 일별 하노라면 어김없이 명절영화의 구색은 다 갖췄다.

명절 극장가의 단골손님 성룡이 없기는 하지만 큰 웃음 주는 조폭코미디 <두사부일체3: 상사부일체>, 엽기 할머니 납치사건을 다룬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초절정 리얼 액션의 본색을 보여주는 첩보 시리즈 <본 얼티메이텀>, 이준익 감독의 휴먼 드라마 <즐거운 인생>을 비롯해 <친구> <똥개> <태풍>에 이어 또 다시 두 글자 제목으로 돌아온 곽경택 감독의 <사랑>까지 다양한 장르와 타깃을 노린 성찬이 푸짐하다.

● 즐거운 인생
이준익 감독의 밴드 삼부작 두 번째
감독 이준익 | 출연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장근석 | 장르 드라마

비주류 삶을 향한 예찬은 이준익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다. <즐거운 인생>은 <황산벌> <왕의 남자><라디오 스타>에 이어 주류에 끼지 못하는 주변부 인생을 토닥이는 또 한 편의 이준익 표 영화라 할 수 있다.

<라디오 스타>에 이은 이준익의 밴드 삼부작(차기작 <님은 먼 곳에>로 삼부작이 완성된다)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즐거운 인생>은 소박한 제목대로 힘겹지만 즐겁고 유쾌할 수 있는 낙관의 미덕을 보여준다.

소싯적 ‘활화산’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음악에 청춘을 바쳤던 네 남자는 지금은 각자 흩어져 일상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영화<즐거운 인생>

명퇴당한 백수 기영(정진영)와 택배, 대리운전으로 생존의 지엄함을 몸소 느끼며 살아가는 성욱(김윤석), 카센터에서 기름밥을 먹는 기러기 아빠 혁수(김상호)는 팍팍한 오늘을 사는 40대 남자들이다.

리더 였던 친구 상우의 죽음을 계기로 장례식에서 다시 뭉친 세 사람.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하던 이들은 활화산에 다시 불을 붙이기로 한다.

여기에 유명을 달리한 상우의 아들 현준(장근석)이 싱어로 합세하자 신구 통합 ‘활화산’이 재출범한다. 활화산 멤버들이 목숨을 건 락(rock)은 즐겁다는 의미의 락(樂)이기도 하다.

명료한 소재와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한 번 뿐인 인생, 즐겁고 후회 없이 살자는 게 영화의 소박한 메시지다.

무엇보다 <즐거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건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장근석 네 배우들이 ‘트릭’없이 실제로 연주하는 음악이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해보니 되더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은 배우들은 ‘불놀이야’ ‘터질거야’ ‘즐거운 인생’ 등의 삽입곡을 능란하게 연주해댄다.

40대 아저씨 배우들이 불가능하리라던 라이브 연주의 소망을 이뤘다는 점에서 영화의 안과 바깥이 기이하게 공명했던 셈이다.

촌스럽지만 거드름 피우지 않고 정직한 감동을 전했던 <라디오 스타>의 온기가 여기서도 이어진다. 올해 추석에 개봉작 중 가장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영화다.

● 본얼티메이텀
액션 스릴러 걸작 '본 시리즈' 완결편
감독 폴 그린그래스 | 출연 맷 데이먼, 데이빗 스트라던, 조안 앨런 | 장르 액션 스릴러

영화<본 얼티메이텀>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에 이은 ‘본 시리즈’의 3부이자 대단원. <본 얼티메이텀>은 이 창조적인 첩보 액션 시리즈의 절정이라 해도 좋다.

2편 <본 슈프리머시>에 이어 영국 출신 감독 폴 그린그래스(<블러디 선데이> <플라이트 93>)가 연출을 맡았고 이 시리즈에서 최고의 매력을 발산하는 맷 데이먼이 예의 고뇌하는 전직 CIA 최정예 요원 제이슨 본으로 돌아왔다.

3편 <본 얼티메이텀>에서도 본은 쫓긴다. ‘블랙 브라이어’라는 한층 강화된 조직의 위협에 시달리는 본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추적자들의 심장부로 돌진한다.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던 기억은 점차 또렷해지고 내가 누구인지, 과거에 어떤 몹쓸 짓들을 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른거리는 진실은 무엇이었는지를 마침내 알게 된다.

3부작으로 이어진 긴 여행의 종착역에서 제이슨 본의 본명선언은 화룡점정을 찍는다. <본 얼티메이텀>은 모든 면에서 전작들로부터 형성된 기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CG나 트릭을 경멸하는 ‘리얼 액션’의 쾌감은 강도를 더한다.

알제리 탕헤르의 미로 같은 골목과 건물 사이를 오가는 숨막히는 추격전, 그곳에서 만난 암살자와의 맨몸 격투,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곡예를 펼치는 극한의 카액션, 기차 역에서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다.

눈에 보이는 이 같은 액션 스릴러의 쾌감 만큼이나 볼만한 것은 시리즈를 관통해 온 한 가련한 전직 스파이의 오딧세이다.

본을 괴롭히는 것은 육체와 정신의 분리다. 그의 정신은 공동의 상태이나 그의 육체는 외부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무감정 상태의 인간병기로 자신을 훈육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은 <본 얼티메이텀>의 주된 줄기를 이룬다.

감정을 말살하고 인권을 유린한 시대에 대한 참회를 담은 <본 얼티메이텀>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독창적이고, 양심적인, 그리고 성찰적인 액션 스릴러의 걸작이다.

●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갑부 할머니의 요절복통 엽기 행각
감독 김상진 | 출연 나문희, 강성진, 유해진, 유건 | 장르 코미디

영화<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이른 바 ‘추석 필(feel)’을 잔뜩 묻힌 명절용 코미디 영화. 1978년 발표된 덴도 신의 일본 추리소설 <대유괴>에서 모티프를 취했다.

삼인조 범죄자에게 납치당한 뒤 82세 갑부 할머니가 경찰과 미디어에 대항해 벌이는 두뇌게임을 다룬 원작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원조 권순분 할매 국밥집’ CEO로 엄청난 부를 쌓은 거부 권순분 여사(나문희).

사기 죄로 복역중인 아내의 보석금을 마련하려는 도범(강성진)과 원정 결혼 사기로 패가망신 직전인 근영(유해진), 도범의 무뇌아 처남 종만(유건)은 이 갑부 할머니를 납치해 가족들로부터 몸값을 뜯어내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노인네를 납치했으나 가족들은 나몰라라요, 이 엽기 할머니는 자신의 몸값이 적다며 500억원의 몸값을 거는 등 당최 도와주질 않는다.

한술 더 떠 권순분 여사는 자신이 돈을 받아주겠다며 소심한 3인조 납치범들을 배후조종한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엔 명랑 코미디에 기대할만한 요소들이 다 있다.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등으로 코미디에 뼈를 묻기로 작정한 듯한 김상진 감독, 강성진, 유해진 등 코믹 연기에 일가견을 가진 배우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엽기 할머니의 본색을 만방에 과시한 바 있는 나문희의 조합이 내세울만한 무기다.

특별사면 사실을 모른 채 탈옥을 감행한 재수 없는 탈옥범들의 이야기인 <광복절 특사>와 마찬가지로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의 웃음 포인트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 인간이다.

납치범 보다 더한 엽기 할머니, 소심한 얼치기 납치범들의 역전된 관계에서 웃음이 터진다. 중간중간 CG를 가미한 판타지 장면까지 배치해 보는 즐거움까지 주려는 살뜰한 노력을 기울인 점도 사줄만 하다.

원작 <대유괴>의 날카로운 풍자정신이나 의미심장한 은유가 사라진 점은 아쉽지만 ‘웃음’으로 승부하려는 영화에 거창한 의미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 두사부일체3- 상사부일체
한미 FTA시대의 조폭 코미디
감독 심승보 | 출연 이성재, 손창민, 박상면, 김성민 | 장르 코미디

영화<상사부일체>

성룡 만큼이나 익숙해진 추석 메뉴가 된 조폭코미디의 최신판. 학교에서 회사로 무대를 옮긴 <두사부일체> 시리즈 3편 <두사부일체3-상사부일체>(이하 <상사부일체>)다. <상사부일체>는 모든 면에서 전작들과 갈라서려 한 노력이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정준호, 정웅인, 정운택, 김상중으로 구성된 ‘계두식의 아이들’은 이성재, 손창민, 박상면, 김성민으로 전원 교체됐으며 윤제균, 김동원 감독에 이어 <남자이야기> 이후 실로 오랜만에 연출 복귀한 심승보 감독이 3편의 메가폰을 쥐었다. 하지만 사람이 물갈이됐다고 시리즈의 속성 자체가 변한 건 아니다.

가학적인 유머와 액션, 감동 코드의 조합, 조폭형 사회에 대한 은근한 풍자, 시리즈 마다 빠지지 않는 계두식의 로맨스까지, <상사부일체>는 전작들의 성공공식을 에누리없이 이어받고 있다.

바야흐로 한미 FTA 시대, 조폭 세계도 무한경쟁에 돌입해 미국 조폭들이 수입된다는 소식을 입수한 계두식(이성재) 패밀리는 급히 전략수정에 나선다.

무사안이한 경영방식에서 탈피해 대기업들의 생존전략을 몸소 체득하겠다는 자각을 한 계두식은 직접 금융권 대기업에 입사해 실전경험에 나선다.

하지만 학교 생활 못지 않게 직장인들의 애환과 비애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복지부동, 상사에게 잘 보이고 동료를 짓밟아야 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정글 같은 조폭 세계와 다르지 않다.

뿌리 깊은 학원 비리와 교육 문제를 풍자와 웃음의 대상으로 삼은 1, 2편에 이어 <상사부일체>가 포커스를 맞춘 것은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다.

과로와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 한미 FTA라는 지엄한 세계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 하는 소시민 샐러리맨들의 초상이 코믹하게 묘사된다. 우리 시대 직장인들의 현실을 묘사하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공감을 얻을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 사랑
곽경택 감독의 선 굵은 러브스토리
감독 곽경택 | 출연 주진모, 박시연, 김민준, 주현 | 액션 멜로

영화<사랑>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태풍>으로 호된 시련을 맛 본 곽경택 감독이 겸손한(?) 사랑 영화로 돌아왔다. 목숨 건 우정(<친구>),

목숨 건 동포애(<태풍>)를 경유해 목숨 건 사랑에 도착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친구>의 우정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꾼 버전이라고 봐도 좋다. 전학 오자마저 첫 눈에 들어온 소녀 미주(박시연)를 좋아하게 된 소년 인호(주진모).

가세가 기울어 미주와 헤어진 지 10년 만에 여고생이 된 그녀를 다시 만나지만 이번엔 엄마와 오빠를 한 번에 잃고 홀로 덩그라니 남겨진다. 또 다시 이별한 뒤 재력가 유회장(주현)의 심복이 된 인호 앞에 미주는 유회장의 정부로 나타난다.

제작 규모는 작아졌지만 곽경택 영화의 특징은 <사랑>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남자들의 우정을 방불케하는 남녀 간의 끈끈한 로맨스, 기구한 운명에 휘말린 주인공들, 비극적 결말을 담은 <사랑>은 올해 추석 가장 진중한 멜로영화다. 선 굵은 남성들의 세계를 주로 다뤄온 곽경택 감독의 스타일은 사랑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에서조차 강렬한 동지애적 관계로 끝까지 가는 우직함이 발휘되는 것이다.

사랑에도 의리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인호와 미주의 인연은 질기고 끈끈하다. 그래서 <사랑>은 섬세하고 감성적인 사랑이야기 라기 보다 뚝심있고 격정적인 로맨스에 가깝다. 곽경택 영화에서 배우들은 경상도 사투리 연기를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감독은 사투리 연기 조련에는 일가견이 있다. <미녀는 괴로워> 이후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은 주진모는 남자다움을 앞세우면서도 순정에 목숨 거는 다면적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출연이긴 하지만 악만 남은 부산 양아치 치곤 역의 김민준도 반듯한 과거 이미지와 결별한다. 추석이라는 즐거운 시기에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즐기려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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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