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고도 잔인한 '사랑의 속살'을 파헤치다통속의 미학을 거절하지 않는 멜로의 전형… 황정민·임수정 연기 눈부셔
매번 다른 걸 하지 않으면 배겨내지 못하는 '새로움 중독증'에 걸린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평생 한 가지에만 매달리는 장인적 작가들도 있다. 영화감독 허진호는 후자에 속한다.
<행복>은 그의 네 번째 영화이면서 네 번째 멜로드라마 네 번째 연애이야기이다. 늘상 비슷한 궤도를 돌며 흘러가는 연애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내 놓았던 허진호는 이번에는 인생 막장에서 만나 애닯게 사랑하다 끝내 이별하고 마는 남녀의 로맨스를 따라간다.
꿈결 같은 사랑과 배신이 있고, 처절한 자탄과 후회, 예정된 헤어짐, 슬픔도 여전하다. <외출> 이후 적지 않은 안팎의 비판에 시달렸던 허진호로서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돌아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사랑은 변한다
남녀 간의 관계가 그렇듯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의 반복이다. 사랑의 순간은 황홀한 천국이지만 싸늘하게 식은 배신의 말 한 마디는 불구덩이 지옥 보다 더 끔찍하다.
<행복>의 주인공 영수(황정민)와 은희(임수정)에게도 이것은 엄연한 진리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술집 주인 영수는 서울에서의 관계를 끊고 가료 차 ‘희망의 집’이라는 요양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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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처음 본 사람은 8년 째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폐병 걸린 여자 은희. 동병상련의 심정과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싹튼 감정은 열렬한 사랑으로 번져간다.
몰래 사랑에서 공개적인 로맨스로 발전한 두 사람은 요양원을 나와 동거에 들어간다. 헌신적인 은희의 노력으로 영수의 병은 호전될 때쯤 서울에서 옛 동거녀 수연(공효진)이 찾아온다. 시골살이의 지겨움에 차츰 젖어갈 때쯤 영수는 은희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된다.
허진호 영화는 모두 비슷하다. 내용과 캐릭터, 정서, 스타일이 죄다 하나 인 것처럼 붙어있다.
<행복> 역시 이러한 유사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중병을 앓는 사람들의 로맨스라는 점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달콤한 연애 후 쓰디 쓴 이별을 가혹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선 <봄날은 간다>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영화와 <행복>의 차이는 그 지극한 통속성에 있다. 도시 남자가 순진한 시골 여자에게 어떤 '동경'을 느끼고 사랑에 빠졌다가 현실감을 찾고 배신하는 이야기는 숱한 통속 멜로드라마의 공식이었다. <행복>은 그 너절한 통속의 미학을 굳이 거절하지 않는다.
언젠가 변하고야 말 사랑의 유한성, 죽음으로 끝장 나고 말 생의 유한성에 천착하는 전작들을 이어받은 이 영화는 단순하지만 '허진호적인 것'의 정수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행복>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사랑의 속살을 섬세하고 때로는 능글맞게 들춰내는 허진호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황은 뻔하지만 인물들은 살아있고 대사는 공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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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멜로 대가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반갑다. <외출>에서 이런 그의 연출감각은 형편없이 후퇴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도시와 시골, 옛 것과 새로운 것 등의 이분법이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보이지만 그에 대한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튀는 것은 아니다.
■ 허진호식 자연주의
이전 영화와 비슷하다는 건 <행복>의 단점이 될 수 없다. 허진호의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찾기 보다 생산적인 것은 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도 그런 즐거움이 있지만 허진호의 멜로드라마에는 '멜로'라는 강한 최루성 장치를 제거했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돋보이는 건 도시 보다 시골이고, 인간 보다 자연이다.
사랑의 망령과 집착, 열패감을 품는 것이 자연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시골 소도시 군산과 <봄날은 간다>의 푸르렀던 들판, <외출>의 삼척 바닷가가 그것을 보여줬다. <행복>에서 허진호는 넋 놓고 보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들에 동화되는 로맨스를 통해 이 지극한 자연주의를 끝까지 밀고 올라간다.
특히 영수와 은희가 사랑을 시작하고 키우는 파라다이스 '희망의 집'은 그 결정체다. 거대한 자연의 에너지에 둘러 쌓인 이 생활 공동체는 흘러가는 모든 걸 잡아둔 시공을 초월한 판타지 공간처럼 묘사된다.
그곳을 떠난 사람은 망가지고 그곳으로 돌아온 사람은 치유된다. 이 영화에서 도시 장면이 초라하고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는 시골 장면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도 이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예의 너른 자연의 풍광으로 심금을 울렸던 일급 촬영감독 김형구의 카메라는 이 모든 걸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배경으로 깔고 <행복>은 제목이 말하는 바, '행복'을 묻는다. 여기엔 어떤 질문도 가능하다. 당신은 행복한가? 행복은 어디 있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영원한가? 등등.
중요한 순간 두 번 반복되는 한대수의 명곡 '행복의 나라로'는 인간이 잃어버린 이상향에 대한 추구를 이 영화가 쫓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독이 이 노래를 넣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 정도로 그 울림은 크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이는 주연을 맡은 두 배우다.
한 없이 뜨거웠다 차갑게 식어버리는 사랑을 얄밉게 연기하는 영수 역의 황정민은 든든하고, 순정한 사랑에 모든 걸 건 맑은 얼굴의 은희를 연기하는 임수정은 눈부시다. 두 배우의 앙상블 연기를 보는 것 만으로도 감정의 충일을 경험하기엔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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