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詩를 쓰다… 스크린에 차려진 '빛의 만찬'첫사랑을 쫓아 꿈속을 헤매는 듯한 이미지의 미학 돋보여

이명세 감독의 은 미스터리(Mystery)였다. 영화(Movie), 뮤즈(Muse), 운동(Movement), 안개(Misty), 꿈(夢, Mong) 등으로 불렸던 이 영화의 제목은 그 어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작 단계부터 영화에 쏟아진 관심은 비상했는데, 한국 최고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이명세의 진화가 <형사 Duelist>(이하 <형사>) 이후 어떤 방향으로 굴절될 것인지, <형사>에 이어 두 번째로 이명세 영화에 주연을 맡은 강동원이 얼만큼의 성장을 보여줄 것인지 등등이 화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공개된 은 이 같은 기대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

시사 직후부터 영화는 논쟁을 낳았다. 본색이 드러난 이명세 영화의 집대성이라는 호의적인 시선과 날로 퇴행으로 치닫는 작가주의 감독의 망집이라는 비판이 맞선다. 여하튼 은 다소 조용했던 영화계에 논쟁을 일으킬 요소가 충분한 영화다.

의 스토리는 이명세의 여느 영화들처럼 단순하다. 뼈대만 추려 놓고 보면 몇 줄이 되지 않는다. 젊고 유능한, 게다가 잘 생긴 작가로 촉망받는 한민우(강동원)는 길을 걷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민우는 자신을 쫓는 ‘누군가’의 정체를 밟는다. 그러던 어느 날 루팡 바라는 술집에서 만난 보라색 옷을 입은 소녀에게 민우는 자신이 구상한 소설을 들려준다.

그 때부터 막혔던 소설이 풀리기 시작하고 그 소녀가 자신을 쫓아다닌 주인공임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피앙세 은혜(공효진)가 있지만 순진한 소녀에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민우. 하지만 왜 소녀는 뒤를 밟는가? 끊겨진 필름 조각을 맞추듯 기억의 편린을 따라가던 민우는 그녀가 과거 자신의 첫사랑 미미(이연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서 첫사랑은 소재이자 주제이고 영화를 관통하는 철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 이명세의 세 번째 영화 <첫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명세가 첫사랑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그에게 ‘첫사랑’은 첫 번째 연애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열정적인 매혹의 기억이고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가치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은 첫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의 추적을 보여준다. 첫사랑을 기억하고 쫓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 영화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낯설고 공포스럽고 미스터리한 과정이면서 다시 돌아가기 힘든 어떤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기도 하다.

<형사>에 이어 이명세의 페르소나가 된 강동원의 연기는 색다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신경증적인 소설가를 연기하는 그는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준다. 울다 울었다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속사포처럼 수다스러워지는 다면적인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 발견은 첫사랑의 뮤즈 미미를 연기한 이연희다.

아름다운 한 시절의 생기와 발랄함, 청초함을 지닌 그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순수의 표상을 되살려 놓는다.

누군가는 영화로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쓰고 논설문을 쓰지만 이명세는 영화로 시를 쓴다. 영화 속 소설가 민우에게 원고를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장은 ‘less poetic more specipic’(시적인 것은 줄이고, 구체적인 것은 늘이고)이라는 주문을 한다. 이는 영화감독 이명세에게 제작자들이 하는 요구와 같다.

그는 영화가 기막힌 이야기나 스토리의 재미가 아니라 이미지의 시적인 표현능력, 영화 만의 특별한 언어성에 의해 다른 예술과 구분될 수 있다고 믿는 감독이다.

시어가 가진 건 의미라기보다 이미지다. 이야기나 캐릭터, 주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감흥을 줘야 풍요로워지고 감성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이명세의 믿음이다.

은 이런 믿음에 기반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영화의 본성을 찾기 위한 이명세의 추적이다. 본인의 말처럼 은 “빛의 만찬”이다.

희미한 빛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부신 빛, 그리고 칠흙같은 어둠을 대비시킨다. 컬러의 변화도 격렬하다. 주요 공간인 민우의 아파트, 루팡 바, 과거의 아름다운 공간은 극명한 대비 속에 보여진다. 때로는 혼란스러울 수 있는 연출은 ‘꿈’이라는 모티프에서 비롯됐다.

미국 체류 시절부터 구상한 에 대해 이명세는 “꿈 속에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건네 준 책의 겉표지에 적혀 있었다는 ‘M’이라는 글자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은 온통 꿈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이야기다.

루팡 바와 청담동 명품 거리, 어두운 골목길들을 하염없이 반복적으로 헤매는 민우의 기억 찾기는 그 자체로 꿈이고 몽상이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은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고 마구 뒤섞인다.

어디부터가 꿈이고 생시인지를 따지면서 영화를 이해하려 든다면 두통에 걸릴지도 모른다. 여기선 조금 다른 감상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따라가며 감상하는 관습적인 영화보기로 은 도통 즐길 수 없는 영화다. 전제했다시피 스토리가 단순하며 캐릭터는 일관성이 떨어지고 딱히 주제라고 할 만한 거창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간의 이미지가 주는 감흥과 감성, 시청각적 스타일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 온전히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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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