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 1집 초판1974년 재판1977년 3판1989년, 신세계레코드

우연일까 필연일까! 무명에 불과했던 신중현이 ‘신중현사단’이라는 록의 철옹성 구축을 시작하고 트윈폴리오가 포크의 대중화에 첫 발을 뗀 1968년에 한대수가 귀국했다. 이들의 등장은 어정쩡하게 동거하던 당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이별 전주곡임을 아무도 몰랐다.

그때 전 세계 젊은이들은 기존사회의 관념과 낡은 가치관에 대항하고 전복을 꾀한 히피문화라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 뜨거운 기운은 ‘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유입되며 큰 사회적 변혁을 몰고 왔다.

위대한 대중음악가의 첫 모습은 치렁치렁한 장발에 통기타 한 대가 전부였다. 무교동의 ‘세시봉’에서 만난 이백천의 주선으로 TBC TV 오락프로 ‘명랑백화점’에 출연했다. 공식데뷔무대다.

TV에 나온 아들의 파격적인 모습에 그의 어머니는 부끄러워 울음을 터트렸다. 대중은 노래보단 동물원 원숭이인양 ‘여자냐 남자냐’ 외모에만 관심을 보였다.

이에 <주간 중앙>은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하다’는 제하로 기사를 내보냈다. 기성세대들의 불편한 심기는 ‘우리나라를 떠나라’는 비난여론으로 이어지며 TV출연에 제동을 걸렸다.

당시 아무도 그가 진지하게 세상을 고민하는 진지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연했다. 노래만 하는 가수는 있어도 작사 작곡을 하고 연주와 노래까지 직접 하는 뮤지션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한대수는 외국 히트 번안 팝 부르기에 급급했던 당시 대중음악계에 결정타를 날리며 한국 포크사에 이정표를 제공했다. 69년 9월 두 여대생의 도움으로 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랐다.

창작곡 발표는 물론 톱으로 연주를 하는 전위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들쑤셔 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힌 그의 공식무대 활동은 금지되었다.

누가 이 요상한 가수의 음반을 제작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겠는가. 대학가에서만 노래를 하다 민생고 해결을 위해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업했다. 그러다 해군 수병 입대영장이 나와 대중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1974년 제대를 하자 그는 가수가 아닌 김민기의 ‘바람과 나’,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 작곡가로 변해있었다. 귀국 6년 만에 CBS PD 김진성의 주선으로 계약금 50만 원을 받고 신세기레코드에서 첫 음반 <멀고 먼 길>을 제작할 수 있었다.

녹음시간은 딱 8시간. 포크가수 방의경의 기타를 빌려 드럼 권용남, 베이스 조경수, 첼로 최동휘, 피아노와 플루트 정성조와 4트랙 동시녹음을 했다. 사진작가인 자신이 직접 촬영한 거친 입자의 흑백사진 속에 담은 강렬한 이미지의 삐딱한 자화상 앨범 재킷은 압권이었다.

노래는 총 8곡. 소홀히 넘길 곡은 단 한 곡도 없다. 불협화음의 연속인 ‘물 좀 주소’는 풀피리 소리 같은 카주 악기와 절규하는 목소리로 강력한 충격파를 날렸다.

방랑하는 보헤미안이 자유와 사랑을 타는 목마름으로 호소하는 이 기괴한 멜로디 속에 담겨진 노랫말은 한대수의 인생의 가사가 되었다. ‘바람과 나’는 서정적인 하모니카 선율에 투박한 포크 질감을 담았다.

정성조의 격조 있는 플루트 선율과 투박한 한대수의 경상도 억양이 빚어내는 ‘옥이의 슬픔’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17세 때 만든 ‘행복의 나라’는 2007년 기네스 기타합주 세계기록 도전 곡으로 채택된 한국 대표 포크송이다.

데뷔앨범은 판매 금지조치로 지하에서만 애청되었다. 감시의 눈빛이 허술해진 1977년 허름한 가방을 둘러맨 흰 운동화 차림의 청년이 어느 시골길을 걷는 뒷모습 재킷이 슬쩍 재 발매되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쫓겨 간 그와 운명을 함께 했다.

가수의 대표곡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행복의 나라로’를 외친 그의 1집은 89년 미발표 곡 ‘하루아침’과 함께 오리지널 재킷으로 오뚝이처럼 부활했다. 그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딸 ‘양호’를 낳으며 비로소 행복의 나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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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