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지는 국토와 펑퍼짐한 사람들의 비애

이십 오 년 전 호박에 버무린 팥 찹쌀떡이 먹고 싶다는 이유하나로 미 중부 오클라호마에서 L.A 까지 대륙횡단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당시 오클라호마에 한국 떡 가게가 정말로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향수병이 도져서인지, 또 아니면 젊은 날의 치기 때문이었는지, 이 무모한 여행의 정확한 동기는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일주일 남짓한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던 이 여행을 통해 본 미국은 무지 무지 큰 나라라는 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 한 인적 드문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느꼈던 그 두려움 섞인 외로움은 인간은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고독한 존재들이라는 제법 철학자인양 하는 통찰을 절로 떠올리게 했었다.

적지 않은 시간 거리를 두고 무리지어 달려가는 차들과 스쳐지나 가면서, 그리고 인적 없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의 불빛을 향해 가면서 느꼈던 그 안도 섞인 반가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특히 좁은 한국 땅에서 어깨 부딪치며 살아가야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일중의 하나일 것이다.

“큰” 나라 미국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실질적인 혜택 중의 하나는 주차 때문에 아옹다옹 싸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집 앞 좁은 골목길에 주차해 놓은 차를 빼주기 위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 좁은 골목길을 들락 달락 하며 아슬 아슬 한 묘기운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나로서는 잠시일망정 큰 나라 미국에 사는 것이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요즘 들어 큰 나라 미국이 또 다른 의미에서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큰 나라에 살고 있는 “큰” 미국 사람들 때문이다. “큰” 이라는 형용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예를 들자면 마음 이 큰, 영향력이 큰 등등으로, 이해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나는 덩치가 큰, 아니 더 솔직히 말해, 뚱뚱한 미국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비만은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사회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 사실은 이 곳 텔레비전만 켜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례로, 그 유명한 오프라 쇼는 비만을 거의 단골 문제로 다루고 있다.

내가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수가 엄청난 설탕 덩어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녀의 쇼를 통해서이다.

또 내가 알기로도,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비만인만을 대상으로 한 쇼가 인기리에 방영 되고 있는데, 이들 쇼의 기본적인 골격은 좀 많이 뚱뚱한 사람들을 외진 장소에 모아놓고 당근(큰 상금) 과 채찍 (쇼에서 탈락하는 것)을 통해 몸무게를 잃게 하는 것이다.

미국의 비만 문제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는 미국 백화점 의류 코너마다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빅사이즈 매장이다. 우리나라 허리 사이즈 36을 가장 작은 사이즈로 시작해서 조금 과장해서 이불로 덮고 자도 될 성싶은 큰 치수의 옷만을 취급하는 이들 매장들은 미국 “큰” 사람들의 천국인 듯싶다.

한국에서 한 몸무게 하던 나의 친구 “심” 이는 이십 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후 당시 한국에 있던 나에게 전화를 해서 “나 여기서 제일 작은 치수만 입어(빅사이즈 매장에서)” 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었는데, 아마 심이도 미국이 큰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점에는 적극 동의 할 것이다.

이쯤에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마 의아해 하실 것이다- “큰” 미국인이 왜 당신이 감사할 일이냐고, 어찌하여 남의 아픔이 당신의 기쁨이 되냐고.

빅사이즈 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중년여인.

설명을 하자면 조금 길지만 우선 이번 여름의 나의 한국 방문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공항에서 삼년 만에 귀국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이 딸을 보신 우리 어머니의 첫 마디 는 “우리 딸 통통하니 예쁘다” 이었다.

이 후 한 달 반을 한국에 머물면서 “통통한” 이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들어 볼 수 없었고, 대신 “뚱뚱한” 이라는 형용사만 귀가 아프게 들어야 했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뚱뚱한지 몰랐었다. 공부하랴 또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랴 바빠서 저울에 올라가 볼 틈도 그리고 관심조차도 없었지만, 미국에서는 내가 뚱뚱하다는 것을 실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자꾸 불러 오는 아랫배가 숨 쉬는데 부담스러워 “나 살 좀 빼야겠다.” 할라치면 옆에서 듣고 있던 “큰” 미국 친구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고, 아차 하는 심정으로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리던 적인 어디 한 두 번 이었던가.

한국에서 나를 가장 많이 구박(?) 한 사람은 바로 우리 친 언니이다. 음지가 양지된다는 말이 있더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보다 훨씬 뚱뚱하던 우리 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다이어트 경험담을 늘어놓은 후, “너도 빼!” 란 일갈로 나를 압박하곤 했다. 신기한 것은, 큰 몸무게의 변화가 없었건만, 한국에서 거울을 통해 본 나는 내 눈에도 훨씬 뚱뚱해 보였다는 것이다. "

한국에 가면 꼭 먹을 것“ 이란 목록까지 만들어 갔던 나였건만, 이런 상황에서 식욕을 잃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않 먹어요!“ 또는 ”아주 조금 만 주세요“ 라는 말로, 때마다 끼마다 모처럼 온 딸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주려 노심초사하시던 우리 엄마에게 불효녀 노릇만 톡톡히 하고 돌아 왔다.

미국에 돌아와 “딱 한번만” 먹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켈리포니아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의 단골 햄버거 가게 에 갔을 때의 일이다. 더블-더블 햄버거를 카운터에서 받아가지고 막 돌아서는 두 “큰” 멕시칸 여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내 자신이 한 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것을 경험했다.

누가 나보고 뚱녀 라고 했던가! 큰 사이즈의 햄버거는 물론 마지막 남은 튀긴 감자 칩 한 쪽 까지도 깨끗이 해치우고 가게 문을 나서면서 나는 정말 행복 했었다. 미국의 “큰” 사람들이 그 때처럼 고맙게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고맙긴 하지만, 미국의 비만은 정말 큰 문제 인 것은 틀림없다. 비만이 당뇨 등의 합병증과 함께 건강하게 장수하는데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 비만은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예로 들면, 공부할 것이 많지만 안하고 있을 때,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주로 나는 쉬지 않고 거의 강박적으로 먹곤 한다.

정말 배가 고파서 계속 먹어대는 “큰” 미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적지 않은 “큰” 미국 사람들이 심리적인 부족함을, 예를 들면 외로움,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먹는다는 나의 추측이 맞는다면, 미국이 직면한 비만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지도 모르겠다.

몇 년 후면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나의 미래도 덜 심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배가 조금 많이 나온 것 말고는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내가 안 뚱뚱한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거나 사랑하는 나의 조국 빼빼들의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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