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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보러 집에 좀…" 회의도중 일어선 교수
너무나 가정적인 미국 가장들의 '가족사랑'이 존경스럽다



내가 무척 좋아하고 따랐던 한 미국인 여자 교수님이 있다. 오십이 넘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그녀의 생기발랄, 열정 넘치는 수업은 다소 황량한 나의 유학 생활에 활력을 주곤 했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녀에 관한 기억중의 하나는 어느 날 그녀 사무실 정면 벽을 장식한 그 유명한 영화배우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의 대형 반신 인물 포스터를 목격한 일이다. 그때의 신선한 충격이란!

그 포스터 사진 한 장은 틀에 박힌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그녀의 교육철학의 상징으로 내 가슴 깊이 남겨졌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도 니콜라스 케이지란 배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가 주연한 영화는 거의 놓치지 않고 보아 왔는데, 그 중 하나가 “The Family Man" 이란 영화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미국 월스트리트 증권가의 한창 잘 나가는 증권 브로커 ”잭“이란 남자 주인공이 어느 날 천사의 개입으로 꿈인지 생시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한국식으로 말해 ”일장춘몽“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잭은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직원회의를 소집하는, 무정하리만치 목적 지향적인 일 중독자인 자신의 현재의 삶과는 정 반대되는, 즉 사랑스런 아내 와 자식들에 둘러 싸여 평범하지만 가정적으로 행복한 삶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미국 가정이라는 것이 수적, 지역적으로 제한 되어있고, 또 각 가정의 자세한 속사정은 그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인지라, 그래서 “미국 남편은 이렇다”라고 일반화해서 말 하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이 비친 미국 남편들은, 특히 한국의 남편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가정적인 것 같다.

미국 남편들의 가사분담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 속에서, 가장인 잭이 아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 먹이느라 애를 쓰는, 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장면 등에서 보여 지듯이, 미국에서 자녀 양육은 남편들도 반드시 아내와 같이 참여 해야 하는 공통의 관심사이다. 이 장면들을 “남편 없는 자녀 양육”에 익숙한 대다수의 한국 엄마들이 보았다면 눈물 나게 부러웠을 것이다.





한국 가정에서 가사와 양육은 전적으로 아내의 일이다. 지금은 많이 개화(?) 됐다지만, 아직도 한국 남편의 부엌출입은 터부시 되거나, 생색내기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또, 아이가 울거나 조금 정신없이 나대기라도 할라치면, “얘 안보고 뭐해” 라며 부엌일에 바쁜 아내를 윽박지르는 간 큰 남편들이 아직도 많이 있지 싶다.

평소 무관심하다가 자녀가 아프거나 또는 자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은 엄마에 떨어지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무심한 한국 남편님들 미국에 오시면 많이 변한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경제구조 때문에, 그래서 서로 바쁘고 힘들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너무나 다른, 그래서 자기 남편과 비교 되는, 가정적인 미국 남편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배운 아내들의 압력과 성화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아파트에 사는 유학 8년차인 한 한국인 부부는 자기 아이들 보는 시간표까지 짜서 벽에 붙여 놓고 정확히 50:50으로 가사와 양육 분담을 하고 있다. 이 분들이 한국에서 살았다면 이 일이 가능 했을까?

한국의 남편님들을 너무 도매값으로 매도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은 마음이 찔린다. 사실 그들도 어찌 보면 안티(Anti) 가정적인 한국의 사회제도와 문화의 희생양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증권맨 잭의 일중독자로서의 삶은 이곳 미국에서는 아주 제한된 수의 사람만이 경험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서 일 중독자의 삶을 거부할 수 있는 직장인의 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특히 IMF 이후엔 정리해고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일 중독자의 삶을 강요당하는 많은 한국의 남편들한테 가사나 양육의 공평분담을 외치기에는 대다수의 한국 부인들의 남편사랑은 너무나 극진한 것 같다.



한국의 안티 가정 문화의 절정판은 한국 직장인들의 파티 문화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나 망년회 등 본격적인 파티의 계절이 다가 오는데 한국서 12월은 “남편들 집 나가는 달”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 엄마 아빠가 다투시는 소리에 한 밤중에 잠에서 깬 적이 있다.

선잠에서 깬 데다, 아빠가 가져온 반짝이는 고깔모자, 파티용 풍선등에 정신이 팔려, 정확한 언쟁의 이유조차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일의 발단은 아빠가 회사에서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혼자 가셨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도 많이 답답하셨을 것이다.

초대 받지 않은 부인을 어찌 혼자 데려간단 말인가! 한국도 요새는 많이 바뀌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요새 부부 동반 연말 파티를 시도하는 회사들도 꽤 있다고 한다. 좋은 변화이다. 한국의 12월이 남편 혼자 집나가는 달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같이 집 나가는 달”로 어서 바뀌어야 한다.

■ 연말 부부동반 파티 많아… 싱글들은 괴로워

미국에서 모든 크고 작은 파티 또는 모임에서 부부동반은 거의 상식이요 기본이다.

역설이지만, 미국에서의 파티의 달 12월은 나 같은 싱글에게는 차라리 괴로운 달이다. 부부 또는 가족 단위의 테이블 어딘가에 “덤”으로 끼어 앉아 고독한 싱글로서의 현실을 뼈저리게 만끽하길 몇 번 반복한 후에는 가능한 한 부부단위의 파티 초대는 거절해오고 있다. 12월말의 학교 기숙사는 적막하다.

대부분의 독신 미국인 친구들도 이곳 큰 명절 중의 하나인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가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텅 빈 기숙사에 홀로 앉아 눈물의 밥을 씹을지언정, 그래도 이 좋은 부부동반 모임의 전통은 계속 돼야 된다고 굳게 믿는다.

한국의 남편들이여, 아무도 데려오지 않는 부인, 혼자 모시고 갔다고 쑥스러워 하지 말지어다. 당신은 한국 부부동반 문화의 선구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선구자는 언제나 외롭다. 내가 아는 어느 미국 교수님은 아이 봐주러 집에 간다는 이유로 교수회의 도중에도 자리를 자주 뜨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가, 또는 가정이 교수로서의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분이나, 그것을 정당한 이유로 인정해주는 다른 교수 분들이나 모두 존경스럽다.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전체 사회의 인식과 뒷받침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새 가정 문화의 선구자가 되고자 하시는 한국의 남편 분들은 아마 많이 외로우실 것이다. 그러나 힘을 내시라. 당신의 아내가 기쁘고 행복할 때, 당신의 삶은 열배 백배 더 기쁘고 행복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 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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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11/13 13:07




글ㆍ사진=자유기고가 나종미 najongmi@netzer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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