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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훈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상업영화의 저수지에서 건진 달콤 쌉싸름한 독립영화 한 편
'9할의 재미·8할의 의미·7할의 정서'로 꾸민 우리시대 왕따 구출기





가을은 두 가지를 권한다. 하나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은행잎 떨어지는 모습을 한나절 정도 바라보게 한다.

가을 이미지는 유행가나 클래식 어떤 것도 잘 소화한다. 유행가는 늦은 밤 산동네의 깊은 골목을 오르는 장면에 딱 들어맞고 클래식은 수북하게 낙엽이 쌓인 가로수 길을 걷는 뒷모습과 잘 어울린다.

철 지난 유행가는 멜로드라마 같다. 공포영화가 여름극장을 책임진다면 멜로 드라마는 가을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멜로드라마 주인공들이 빚어내는 슬픈 정서와 가을의 쓸쓸함은 일란성 쌍생아 같다.

곽경택의 <사랑>과 허진호의 <행복>이 가을 관객에게 쓸쓸함을 선물했으며 이언희의 <어깨 너머의 연인>과 권칠인의 <뜨거운 것이 좋아>가 지속적인 정서 마취제로 투약될 예정이다.

상업영화는 <행복>의 대사처럼 ‘천천히 밥 먹는 것에 짜증’이 나듯 장면이 지루해지면 황정민임수정을 떠나는 것보다 더 빨리 관객은 극장을 떠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과 새해 시즌은 그 해를 대표할 만한 간판 영화로 관객 몰이에 박차를 가한다. 상업영화는 관객이 원하는 것을 주고 흥행으로 보상받는다는 논리로 개봉한다. 최근 한편의 독립영화가 한국영화의 개봉관행을 교란하면서 등장했다. 이 작품은 멜로 드라마도 아니며 관객이 선호할 스타도 등장하지 않는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다.

양해훈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집단따돌림을 당한 주인공의 탈출기다. 저수지는 우울한 학창시절을, 치타는 왕따 당하는 인물을 표상한다. 양해훈 감독도 “학창 시절 반마다 꼭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 별명이 치타였죠.

치타는 주인공 별명이면서 왕따를 지칭”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제목은 이미 영화가 보여줄 모든 서사를 말해주고 있다. 영화 내용 역시 제목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즉 주인공 제휘는 학창시절 따돌림을 당했으며 그 상처로 인해 자폐에 빠졌다.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한 발자국만 디디면 얼음이 깨져 빠질지도 모르는 저수지와 같다.

그의 자폐적 삶의 원인은 표라는 친구다. 표는 학창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일관되게 제휘를 괴롭힌다. 제휘는 결국 누군가에게 표의 제거를 의뢰하지만 결국 표 대신 도와준 이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만다.

하지만 이 충격적 사건을 겪고 나서 제휘는 표라는 과거에서 벗어나 저수지 같은 현실에서 건져진다. 결국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집단 따돌림의 현실에서 왕따를 구해내는 왕따 구출기인 셈이다.

이 영화에 대해 ‘왕따에서 벗어나는 서사’만 언급한다면, ‘수박은 둥글다’로 수박에 대해 모든 설명을 다 마치는 것처럼 무성의한 태도다. 이 영화의 9할의 재미와 8할의 의미와 7할의 정서는 서사 밖에 놓여있으며 그것은 한 장면 한 장면을 파고드는 전투적인 관객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여기가 선명한 서사와 잘생긴 스타로 승부하는 친절한 상업영화와 모호한 서사와 연기력 좋은 배우로 채워진 독립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 영화는 저수지에서 시작하여 저수지에서 끝난다. 첫 장면에서 긴 여백처럼 저수지가 익스트림 롱 쇼트로 펼쳐진다. 이 장면은 보통 관객에게 눈 덮인 저수지의 풍경으로 보이겠지만 무장된 관객은 제휘의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 하나 하나가 가슴에 박히면서 주인공의 내면이 저수지를 통해 전해질 것이다.

저수지에서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전해지는 숨소리와 나갈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저수지라는 현실과 갇혀버린 인물의 고립감이 뒤늦은 편지처럼 전달된다. 이 때 저수지는 물을 담아놓은 공간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버리고 한 개인을 집단 따돌림하는 무서운 현실의 은유로 다가온다. 제휘는 타자에 의해 고립을 강요당한 섬이 된다.

주인공이 이 섬에서 탈출하는 길은 “타-파-피-카”라는 개인적 주술의 힘이거나 고립시킨 폭력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표의 살해 기도) 자신의 과거를 죽이는 행위가 지도를 만들어낸다. 상업영화는 탈출 여부에 관심을 보이지만 독립영화는 지도에 따라 길을 가는 과정을 오래 사유하고 천착한다.



독립영화는 훈장처럼 ‘어렵고 지루하다는 평가’를 달고 다니는 연유가 바로 과정의 지루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폐적 삶을 사는 제휘는 미궁에 살고 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장희라는 여자를 만난다.

장희는 과거의 상처라는 저수지에서 못 빠져 나오는 그를 건져줄 조력자이며 동시에 미궁에서 벗어나는 지도이다. 그들은 구겨진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서적인 연대로 인해 출구로 나아가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제휘와 장희는 누군가의 폭력적인 힘으로 ‘접혔던 종이가 다시 서서히 펴지는 것’처럼 움추러 들었던 삶을 서서히 회복해 간다. 김혜리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이 장면은 “사람의 흉터와 악의가 치유되는 과정은 구겨진 종이가 펴지듯이 천천히 일어나는 오래 지켜봐야 하는 일”임을 역설하는 주제를 축약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양해훈은 주인공처럼 낯을 가리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주제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여 은유적인 장치로 보여주거나 멀리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다시 정공법으로 돌아온다.

은유적 모호함과 정공법의 선명함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이 감독의 스타일인지 아니면 아직 덜 다듬어진 연출력의 기복인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젊으며 이 작품이 그의 처녀 장편 데뷔작이기에.

양해훈 감독의 거친 연출은 이 영화가 청년영화이기보다 성장영화에 가깝게 만든다. 이 영화는 집단 따돌림이라는 성장통에 대한 사적인 천착은 빛을 발하지만 시대의 정신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은 청년영화적 공격성은 미흡하다.

공격성은 주제적 측면도 아쉽지만 여백의 화면과 서사적인 실험과 대안적 카메라 같은 미학적 전복성에는 더욱 더 소극적이다. 이 작품은 다른 독립영화에 비해서는 분명 비교 우위에 서 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좋은 성적으로 일류선수가 되었다고 자만해서는 위험하다.

흔히 상업영화의 완결성이 주는 미학적 나태함은 독립영화의 전복성이 야기하는 미학적 참신함으로 견제한다. 하지만 상업영화의 깔끔함을 거절하고 독립영화의 실험성을 자제할 때 감독은 미궁에 빠진 치타가 된다.

양해훈 감독이 독립영화의 장에서 작업을 지속하거나 상업영화의 장으로 편입되더라도 이 영화에서 벗어 나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그는 영화라는 저수지에서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는 감독이 될 것이다.

■ 문학산 (본명 문관규) 약력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현 세종대 강사, 영등위 영화등급 소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 저서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예술영화는 없다><한국 단편영화의 이해>. 영화 <타임캡슐 : 서울 2006 가을>, <유학, 결혼 그러므로 섹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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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11/13 13:22




문학산 cinemh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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