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고 탐스러운 늦가을의 수채화

생각해보니 이렇게 늦은 가을날에 산행을 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숱한 날들을 산과 들에서 지냈으나 10월이 저물면 산행을 거두고 책상에 앉아 그동안 얻은 조사결과들을 엮어 내는데 골몰했었던 듯 하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생겨도 멀찌감치 제주도 쯤으로 떠나지 남도의 늦은 산자락을, 들판을, 혹은 바닷가를 뒤적여 본 기억이 있던가.

다사다난하게 여름을 지낸 까닭에 부득이 뒤늦은 산행을 했다. 대부분의 풍광들, 그 속에 살아가는 풀과 나무들은 내 머릿속의 지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뜻밖에 인상적인 식물이 있었는데 바로 산부추이다.

식물도감 상에 산부추는 7~9월쯤이 개화기이고 더러 10월의 기록도 있었으나 11월에 접어든 이 즈음, 곱고도 강렬하게 피어있는 모습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간 더러 산지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햇볕에 드러나 튼실하고 건강하면서 더 없이 아름답게 피어있던 산부추. 한쪽에선 열매로 익어가는 송이들도 보이고 있으니 그 자리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던 것은 지금부터 한참 전이었을 듯 하다.

산부추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키는 당의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크게 자라면 무릎높이 정도 되려나. 잎은 2~3장이 약간의 각도를 두고 위로 뻗어 올라온다. 때론 줄기보다도 길게 자라기도 한다. 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들은 6장의 꽃잎을 가진 작은 꽃송이들이 공처럼 동그랗게 모여 달린다. 꽃색은 자주색보다는 조금 연하고, 팥죽색이라고 하기엔 더 밝고 선명하다. 어떤 책엔가 붉은 자주색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대자연에 존재하는 꽃색 하나 표현을 하기 어렵고 보니, 우리의 표현력 탓도 있으나 자연의 대단함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아름다운 꽃빛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하더라도, 거기에 햇볕을 받아 생명이 일렁이는 모습, 먹은 초록색줄기에 어울어진 그 모습은 아무래도 자연에서 마음을 느끼고 보시라는 권유밖에는 할 길이 없다. 수술대가 꽃밖으로 길게 나오고 늦은 계절이나 꽃이 있으니 나비도 찾아 든다.

산부추는 마늘이나 부추 혹은 양파와 같은 집안 식구들이다. 그래서 땅속을 보면 비늘줄기가 발달하여 뿌리가 달리고 식물체에선 약간의 마늘냄새도 난다. 그래서 연한 비늘줄기나 잎을 나물로 무쳐 먹는 등 잘 활용하면 된다. 한방에서는 잎과 종자를 산해라고 하여 여러 증상에 처방한다고 한다. 같은 집안의 다른 식물이 매우 유용한 식용, 약용식물인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된다.

많이 활용되고 있지는 않으나 관상적인 용도로 개발해보는 일도 좋다. 이미 두메부추는 야생화의 좋은 소재로 활용되고 있으니 꽃빛이 좀더 진한 산부추나 참산부추 그리고 최근에 우리나라 미기록종으로 확인된 갯부추같은 큼직하고 튼실한 꽃송이를 가진 종들을 함께 어울려 심으면 좋을 듯.

같은 연구실에 이 부추집안 식구들을 연구하는 친구가 있다. 덩달아 이 식물들에 기웃거려보니 재미있고도 어려운 집안이다. 이 땅에 자라는 앞에 말한 식구들 말고도 강가에 자라는 강부추, 돌틈에 자라는 돌부추, 한라산 습지의 한라부추, 압록강변에 있다는 노랑부추…. 아 세상은 넓고 공부할 식물, 보기 즐거운 식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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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