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인가? 아무도 대답없는 질문일상의 건조한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가는 미학적 크레용모호한 화법 유심히 따라가면 텍스트를 발견하는 재미 쏠쏠

영화는 직접 보여주거나 혹은 감추면서 드러낸다. 전자는 대중영화의 화법이고 후자는 예술영화의 스타일이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감독은 관객과 소통에 목숨 걸고 예술적 성과를 지향하는 작가는 미적 성취에 전념한다.

세계영화사에서 작가의 반열에 오른 감독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영화가 소통되지 않고 수수께끼로 살아남기를 바란다. 로버트 알트만은 “ 내 영화를 한 번만 본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면서 내 영화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겠다고 얘기하는 일이 나를 제일 낙담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험영화의 대가 브뉘엘도 비슷한 발언을 힘주어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기자와 평론가들의 시사회 반응이 좋으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브뉘엘 스스로 어렵고 모호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관객들이 쉽게 알아차린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이다.

역시 거장의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펠리니도 창작에 대한 열정이 넘쳐서 주어진 서사 방식으로 표현의 열망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는 영화 본질과 자기 사상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해 리얼리즘적 태도를 버렸다.

그의 영화에 대해 스톤은 “ <81/2>을 보고나서 자신들이 본 영가 어떤 것인지 확신할 수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고 비야냥거렸다.

예술의 장에 자리한 영화는 모두 모호성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예술의 신분증 역할을 한다. 윤성호의 <은하해방전선>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이 서사 방식은 대안적이며 장면연결은 불연속성을 보여주며 모호성과 진정성의 사투를 벌이게 한다.

이 작품은 구체적인 지도를 버리고 모호성의 발자국을 따라가야한다. 이 영화는 자기 반영적 영화다. 영재의 직업이 감독이기에 자기 반영적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영재의 장편영화 작업이 지연되고 인덕원 삼성 아파트의 표지가 보이고 윤성호 감독이 제작한 <우익청년 윤성호>와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의 장면이 등장하는 점을 미루어 판단한 것이다.

심지어는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의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와 연애는 응석이라는 점에서 닮았다”라는 나레이션의 출처까지 전하면서 자기 반영성의 극점에 도달한다.

윤성호의 자기 반영성은 진지함보다는 유희적 장치에 더 관심을 보인다. 영화 감독 영재는 여자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감독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군대 고참은 민중은 안중에도 없느냐고 질타한다.

영재는 ‘영화로 혁명을 꿈꾼다’ 같은 위대한 이상을 힘주어 말하는 대신 연애용이라는 사적인 용도로 영화를 축소한다. 이 상황은 이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그것은 직설법은 피하고 은유적으로 말하거나, 우회적으로 말하면서 경직성을 피하고 유희성을 얻는다.

지하철 장면은 이념에 대한 혐오와 진보에 대한 반감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진보는 빨갱이라는 도식으로 진보에 대한 생경한 거부감을 보여준다. 연기자는 실제 영화사의 대표라는 점에서 감독과 대표라는 묘한 위계적 은유로도 읽힌다.

영화 감독 영재는 언어 욕심이 많다. 여자와 만나거나 남자와 만나거나 그는 늘 마이크 잡은 정치가처럼 다변을 쏟아낸다. 그가 쏟아낸 말은 동어반복의 자루에 쓸어 담을 수 있다. 감독의 말은 침묵 보다 더 작은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어느날 실어증에 걸리고 그로 인해 복화술과 필담이라는 제한된 의사소통 도구를 활용하지만 오히려 더 구체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감독과의 대화에서 ‘소통’의 불가해함은 여실하게 드러난다. 감독과 배우는 공식 답변의 화두로 ‘소통’을 정한다.

배우 혁권은 관객들이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한 목소리로 , 결국 소통으로 귀결시킨다. 윤성호 감독의 전략인 유희와 동어반복의 정치학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한 단어로 답변을 반복하는 행위는 감독과의 대화가 갖는 정치성을 거부하고 무화시키면서 유희의 장으로 만들어버린다.

정작 관객이 던진 ‘영화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배창호 감독의 발언으로 대신하려하다 발목을 잡힌다. 배창호 감독은 ‘영화는 관객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러브 스토리>에서 말했으며 그 주장에 동의한다고 반복했다. 객석에서 까칠한 관객이 더 캐물으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객석의 관객이 연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자 자원봉사자가 관객을 끌어낸다. 그 관객은 감독과의 대화의 룰을 위반하여 극장 밖으로 추방되고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직한 답변을 찾고 있는 감독 영재의 시점 샷으로 은하가 들어온다

. 객석에서 질문을 던진 관객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양해훈 감독이다. 양해훈 감독은 윤성호 감독과 곡사, 김종관과 함께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의 다음 물결을 밀고 갈 독립영화의 차세대 대표주자다. 이들은 스스로 세대에게 영화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함께 질문지의 여백을 채워야할 감독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필자는 일찍이 윤성호의 영화와 카메라에 대해 ‘미학적 실험을 통해 저항하고 , 비문의 나열 속에 메시지를 숨겨두고, 다양한 텍스트와 연대하여 다성적 목소리를 생성하며, 관습적인 일상의 건조한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가는 미학적 크레용’이다고 극찬한 바 있다. 그의 단편영화 시절의 스타일은 장편 독립영화에서도 그대로 연계되고 있다.

윤성호의 영화는 단편영화부터 독립장편에 이르기 까지 “ 한신 한신, 한 프레임 한프레임에 내장된 의미의 창고를 천천히 경직되지 않게 훑어보는 자에게 진정한 발견의 재미를 부여하는 텍스트”로 자리한다.

그의 텍스트는 발견하는 자에게만 수신되는 이상한 편지같다. 그의 영화는 적극적인 관객의 참여를 요청한다. 이 점에서 그의 영화는 불친절하며 동시에 공격적인 관객을 자극하는 마취제다.

그의 텍스트는 연애와 정치와 영화라는 삼각 편대가 폭격하는 한국현실을 밑그림으로 한다. 한국현실이 굳건한 배경으로 자리하기에 그의 유희적 제스처와 카니발적 장면 연결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을 높여준다.

가독성을 갖는 영화, 소통할 수 있는 영화, 미학적 성과를 이룬 영화에 대한 독립영화계의 갈망은 윤성호의 등장을 주목하게 한다.

그의 텍스트는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냉장고 같은 우연성의 산물이 아닌, 동일한 스타일로 만든 단편영화의 계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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