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앨범 시대 연공식 신호탄… 한국 포크음악의 전설을 담다사랑·이별 타령 뛰어넘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 노래에 담아

19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 시작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1971년에 발표된 그의 1집 은 ‘기념비적’이라는 찬사조차 2% 부족한 명반중의 명반이다. 그러나 빛나는 찬사 뒤엔 한 미술학도의 인생을 반체제 혁명가 못지않은 탄압과 감시의 가시밭길로 몰아넣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기란 이름 뒤에는 ‘저항’과 ‘금지’라는 긴 그림자가 오랫동안 길게 드리웠다. 하지만 금지시키고 죽이려 해도 그의 노래들은 시퍼렇게 불멸의 생명력은 과시하며 국민가요로 등극했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친구’, ‘꽃피우는 아이’등 김민기 1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그에게 ‘한국포크의 전설’이란 월계관을 씌웠다.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하자마자 낙제를 했다. 곧바로 휴학을 한 그는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림물감 값이 부족했기 때문. 이때 고교동창 김영세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듀오 ‘도비두’ 결성을 제의해와 대학가와 시내 음악다방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학업보다 음악에 매력을 느낀 김민기는 1970년 6월 29일 명동 YWCA 청개구리 창단멤버가 되었다. 그곳에서 고교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과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이후 김광희, 방의경, 송창식, 김도향등 많은 포크가수들과 음악교류를 시작했고 평론가 최경식, CBS 김진성PD등과 친분을 맺으며 그의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래를 부르라’는 평론가 최경식과 기독교방송 김진성PD의 지원으로 음반제작의 길이 열렸다. 서울음대의 정성조와 김광희의 도움을 받아 1971년 11월 전설적 명반인 첫 독집을 발표했다.

또한 듀오 도비두가 노래한 ‘친구’와 누나의 친구 김광희 곡 ‘세노야’가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을 통해 연속으로 발매되었다.

김민기의 음악은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선동적인 운동권 노래로만 인식되어왔다.

그의 노래는 확실히 이전과는 틀렸다. 사랑과 이별타령으로 일관된 대중가요의 표현 한계를 넘어 삶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은유적으로 담은 시적인 노랫말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김민기 1집은 외국의 히트 팝송 번안에 급급했던 이 땅에 창작 앨범의 시대를 열어 제친 공식 신호탄이었다. 음악 색깔도 다양했다.

‘친구’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그날’ 같은 노래들은 클래식 기타의 선율로, 정성조 쿼텟의 연주가 더해진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 ‘종이연’ 등은 재즈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피아노와 현악으로 연주된 ‘아침이슬’은 차라리 클래식이었다.

남북을 초월한 민족가요 ‘아침이슬’은 휴학 중 맨발로 동숭동을 배회하며 새 학기를 기다리다 ‘그냥 그저 재미삼아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꿔 본’ 노래라 한다.

1997년 이 노래의 친필악보는 참여연대의 유명인사 기증품 경매에서 150만원에 팔려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포크 명곡 ‘친구’는 1968년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동해안으로 여름야영을 갔다가 한 후배가 익사를 당했을 때 사고를 알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자신의 슬픈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이 음반은 화두는 최초의 금지곡 '꽃피우는 아이'. 연속적으로 퉁겨대는 힘찬 기타 파열음 사이로 흘러나온 구수하고 힘찬 그의 목소리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며 상당기간 음반은 제법 팔려나갔다.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환영회 무대. 초청가수 김민기는 후배들에게 ‘꽃피우는 아이’등 노래를 지도했다. 유신정권이란 통제의 암흑기에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반정부 분위기를 신입생들에게 심었다”는 죄명으로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후 그의 독집음반은 전량 압수, 폐기되었다.

데뷔음반을 녹음했던 이청은 “마스터테이프를 압수당하고 제작에 관여한 모든 관계자들이 수차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받아야 했다.”고 전한다. 금지조치 이후 그의 음반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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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