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러나 꼭 필요한 카드… "이제 미국을 용서하마"

미국에서는 어디에서나 카드결제는 기본이다.
좀 재미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라도 볼라치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짜증나는 광고들.

이 광고들을 피해 요리저리 리모콘 운전을 해야만 하는 참기 힘든 성가심, 아마 시청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일이다. 해도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광고에 나의 인내심이 바닥이 날 즈음- 보통 이럴 땐 아예 텔레비전을 꺼 버린다―나의 시선을 확 사로잡은 비자 신용카드 광고 하나.

손에 신용카드 하나씩을 들은 이 광고 속 어떤 가게의 손님들은 “서울 대구 부산 찍고” 라는 볼륨댄스 교사의 구령에라도 맞춘 듯 일사분란 “뉴욕 시카고 LA (카드) 긋고”를 한다. 신용카드와 함께하는 경쾌 발랄한 삶의 활기가 마구 마구 느껴질 무렵, 이때 산통을 확 깨는 현금을 내는 사람.

출납 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동전. 음악은 멈추고, 댄스도 멈추고, 꽃 가게의 싱싱하던 꽃마저 시들어버린다. 이 짧은 광고가 전하는 제법 심오한 메시지. 크레디트 카드는 당신 삶의 활력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현금이 아니라 신용카드라는 발상. 이 얼마나 신선한 사고의 반전인가. 특별히 현금이 대접 받는 한국 문화권에서 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한국에서 신용카드 결제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물론 백화점에서 자체 발행한 신용 카드를 그 해당 백화점에서 사용하는 경우를 빼놓고는 말이다.

몇 천 원 정도의 소액을 카드 결제 해주는 개인 매장이 있었던가? 그런 간 큰 짓 시도를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한 가지 기억 나는 것은 한국의 많은 가게에서 “현금우대” 란 명목으로 이중 가격(현금 결제 시, 카드 수수료만큼의 돈을 할인 해주는 것)으로 물건을 팔았다는 것이다.

경제 분야에 관하여 안목이 좀 부족한 나로서는 카드 수수료가 소비자가 안아야 할 부담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이중 가격제도가 소비자의 신용카드 사용을 억제 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 미국에서 신용카드 사용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대부분의 미국 마트에 가서 단돈 몇 불 어치 물건을 사고 신용 카드로 결제를 해도 째려보는 직원은 아무도 없다. 이런 소액 결제는 신원 확인도 안 한다. 앞의 광고 이야기, 비록 조금 과장은 됐지만, 보편화된 미국의 신용카드 사용 현실을 잘 반영한다.

신용카드 한두 장 달랑 들고 다녀도 사는데 거의 아무 문제가 없기에, 마냥 방심하다가 막상 주차할 때 쓸 현금 일 이 불이 없어 낭패를 당한 경험 이곳 사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어본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아무나 신용카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의 미국 신용카드 도전기는 사실 눈물겹다. 반평생 남짓한 인생을 살며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것이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잘 나가던 인생 이었건만, 웬걸 칠전팔기란 말이 무색하게 거절에 거절을 당해오다 유학 생활 팔,구년만인 작년에야 겨우 신용카드 하나를 승인 받았다.

비록 사용한도 300 달러(애게!) 이었지만 나로서는 감격! 감격! 카드 빚 갚지 않고 고국으로 날라버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신용불량 유학생들에 대해 쌓아온 원망도 한 순간에 털어버리고.

방값, 전기세, 전화세 체납 한번 한적 없건만, 단지 신용 거래 기록이 없는 유학생 이라는 이유 하나로 ‘신용 확실한’ 나를 거부해온 미국의 모든 카드 업계 종사자들도 너그럽게 용서해 드리고.

■신용거래 기록이 없는 유학생은 거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유학생이 신용카드를 갖기는 하늘의 별따기 였다. 300달러가 넘는 연회비를 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 카드 하나를 만들든가, 아니면 은행에 일정액을 담보조로 선지불 해놓고 그 한도 내에서 쓰는 신용카드란 이름 붙이기가 무색한 ‘무늬만’ 신용카드를 만들든가.

이도 저도 하기 싫어 신용카드 없이 지내오다가 “당신 지갑에 무엇이 들었습니까? (What's in your wallet?)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C카드회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 덕에 운 좋게 연회비 없는 신용카드 하나를 얻었다. 이자율은 높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할부로 뭐 사는 일은 안 할 거니까.

할부할 일도 없는데 뭐 그리 목을 맸냐고 궁금해 하실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신용카드 도전 동기는 창피하리만큼 단순하다.

백화점 세일 갈 때마다 백화점 신용카드 소지자는 누구나 다 받는 10~20% 에 이르는 엑스트라 디스카운트, 나 같은 유학생하고 역시 비슷한 처지의 멕시칸 아줌마들만 못 받는 것이 어찌나 속상하고 억울하던지.

참고로 LA 지역의 많은 멕시칸들은 정식 이민 서류 없이 사는 이들이 많고, 또 정식 서류가 있다 해도 쌓아 놓은 신용 없기는 나나 매 일반이다. 얼떨결에 얻은 카드지만 참 유용하게 쓰고 있다.

엑스트라 디스카운트는 물론이고, 작년 여름 계획에 없던 독일어 강좌 듣느라 은행 잔고가 바닥을 치는 사고가 났을 때 카드 덕을 단단히 봤다. 먼 타국에서 급해도 마땅히 손 벌릴 곳 없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신용카드는 생명줄과 다름없다.

이곳에는 신용카드를 새로 신청할 때 다른 회사 카드 빚을 가지고 오면 적어도 육 개월 길게는 일 년 반까지 그 옮겨온 빚에 대한 이자를 면제해주는 제도(balance transfer) 가 있다. 이 제도를 잘 이용하면 몇 천불에 이르는 가계 빚을 무이자로 끄떡없이 몇 년 버틸 수 있다.

물론 가져오는 빚의 2~3 %에 해당하는 돈이 수수료로 나가니까 아주 공짜는 아니다. 주변에서 실지로 이런 혜택을 보고 있는 알뜰한 한국 유학생 분들이 꽤 있다. 한국판 ‘카드 돌려치기’ 와 얼핏 비슷한 것도 같지만 처음 일정기간 이자를 면제해주는 새 카드를 계속 발급해서 이용하는 좀 다른 개념이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잘 쓰면 생명줄인 신용카드도 오용 또는 남용하면 신용파산이라는 경제적인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플라스틱 카드가 주는 ‘돈 같지 않다’는 착각에 계산 없이 긋고 다니다가 결제일에 즈음하여 황당함을 몇 번 경험한 나의 절친한 미국 친구 하나는 아예 신용카드를 집에 두고 안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돈 없다고 나보고 밥 사란다). 카드 회사가 쳐놓은 쥐덫도 만만치 않다.

한번은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면서 어쩌다 나의 한도 생각을 못하고 덜컥 카드결제를 해버렸는데- 이런 경우 자동 결제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 환불은 돼도 결제 자체를 취소할 수는 없다.

단돈 오불 초과에 사십 불이라는 터무니없는 벌금(Over-the-Credit-Limit fee)을 낼 뻔한 적이 있다. 이럴 경우 카드회사에 전화해서 잘 설명하면 대부분 낸 벌금을, 비록 두세 달 후라도 되돌려 준다.

요즘 미국에서 한창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신용도용 문제도 나의 신용카드사용을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사년 전 누군가 내 은행 구좌 번호를 도용하여 인터넷 구매를 하는 바람에 무엇인지도 모르는 물건 값을 나도 모르게 몇 달간 지불한 적이 있다. 당시 잠시 한국에 나가 있는 상황에 일어난 일이라 처리하기에 애를 먹은 기억이 있다.

최근 ‘T.J. Max’ 나 ‘Marshall’ 등 나도 잘 가는 인기 할인점들에서 무더기로 개인 신용카드 정보가 새나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 철저한 신용평가… 힘들게 얻은 만큼 보상도 커

미국의 신용카드는 한국처럼 재산세 또는 소득세 영수증에 근거하여 발급 여부를 결정하고 한도를 정하는 신용카드가 아니라, 성실, 정직, 책임감이라는 개인의 신용 에 더 무게를 두는 진정한 의미의 ‘신용’ 카드이다. 오랜 기간을 두고 성실하게 맨 밑바닥부터 쌓아가야 하는 미국의 신용카드 제도. 힘들게 얻는 만큼 보상도 크다.

점수로 환산되는 신용 점수에 따라 거의 0%에서 20%대 까지 차별적인 이자율이 적용된다. 사업을 하는 내 친구 하나는 신용 카드 점수를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당장 필요치도 않는 돈을 일부러 빌려 쓰고 한 달 안에 갚아 신용 점수를 올리면 어떨까라는 황당한 소리를 해서 나를 어이없게 만든 적이 있다.

이해는 간다. 이 나라에서는 신용은 돈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집을 살 일도 사업을 할 일도 없을 나이지만, 그 동안 열심히 신용관리를-뭐 별거 아니다. 적은 액수라도 제 날짜에 꼬박꼬박 돈 잘 내는 것- 해온 덕에 이제 카드 한도도 3500 달러로 늘었고, 이자율은 8% 대로 내려가고, 신용 점수도 미국 사람 평균치에 거의 육박한다는 700 점을 돌파했다.

요즘 미국 은행 돈이 남아돈다더니 사실 인가보다. 나 같은 사람한테 빚 좀 써 달라고 거의 하루가 멀다고 편지가 온다. 뿌듯하다.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란 것 이제야 알아주나 보다!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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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