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고국 방문 열풍 타고 밀리언셀러로 깜짝 빅히트대마초 파동 수난까지… 가사 다른 트로트 버전 먼저 발표되기도

국민가수 조용필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히트곡을 탄생시킨 뮤지션이다.

그의 대표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선사한 영광스런 국민가요이지만 좌절까지도 함께 안겨준 영욕의 노래이기도 하다. 1976년을 평정한 이 앨범은 안치행이 창립한 안타프로덕션의 80년대 대중음악계 평정을 향한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 최대 이슈는 재일교포 고국방문. 그 열풍을 타고 오랜 무명기간을 지나온 조용필은 일약 깜작 스타로 떠올랐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그의 매니저는 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국가대표 축구선수출신 이회택이었다.

막 기획사를 출범해 첫 작품 ‘최헌과 호랑나비’로 주목받기 시작한 안치행에게 그가 조용필의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이에 안치행은 킹레코드에 제작을 의뢰했지만 뮤지션출신으로 제작자가 된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박성배사장(일명 킹박)에게 “너무 일본 놈 스타일이라 안 된다”는 면박을 당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지만 안치행은 오기로 음반제작을 강행했다. 만약 안치행의 이런 결단이 없었다면 명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무도 모른 채 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통속적이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 가사는 사회적 분위기를 담아 ‘그리운 내 님아’ 부분을 ‘그리운 내 형제여’로 수정되었다.

앨범을 내기엔 곡이 모자라 안치행의 록그룹 영사운드 기성곡으로 메워 1976년 4월 빨간 바탕에 조용필의 장발사진이 담긴 초반이 나왔다. 홍보조차 못했지만 이 앨범은 부산을 시작으로 급속도로 반응을 얻자 4개월 후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한 사진으로 디자인을 교체해 재 발매되었다.

100만장이 넘는 밀리언셀러행진이 시작되자 그 해 김부자를 시작으로 1977년 나훈아, 황금심, 조미미, 이성애, 태우, 김희갑, 박성희, 남성듀오 머슴아들, 김세레나등 수많은 남녀가수들에 의해 ‘돌아와요 부산항에’ 리메이크 열풍이 불어 닥쳤다.

또한 1978년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1979년엔 세계적인 폴 모리아악단에 의해 연주곡으로도 취입되었다.

"깜짝 놀랐다. 새벽다방에서 인기가 시작됐는데, 타이틀곡보다 오히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신청이 자꾸 들어와 곡을 찾아 다시 연습을 했다.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던 곡이 결국 대표 곡이 되어 버렸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유명세를 탄 조용필은 1977년 장충체육관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공연을 끝으로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 금지의 아픔을 겪었다. "당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 주전자 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 절망감에 이 땅을 뜨고 싶었다." 이후 좌절보다는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도록 판소리 공부에 전념했다. 1979년 말, 해금 소식과 더불어 조용필은 록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했다.

트로트에서 발라드ㆍ록ㆍ민요를 아우르는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수난을 안겨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의식적으로 절대 부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76년 이전에 가사와 장르가 다른 트로트 버전이 먼저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노래를 취입한 가수도 조용필을 필두로 김석일 등 제법 있었다. 1972년 아세아를 통해 발표한 첫 독집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은 청년 조용필의 앳된 목소리에 통기타 두 대로 연주한 트로트 버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된 진귀한 음반이다.

가사도 달랐다. 조용필의 첫 버전은 그저 통속적인 단순한 사랑노래였다. 1976년 부분 개작이 이뤄져 빅히트가 터졌던 것이다. 이 불후의 명곡은 사실 60년대에 탄생된 노래다.

음반으로 취입된 최초의 버전은 조용필보다 2년 앞서 1970년 유니버셜에서 옴니버스로 발매한 '돌아와요 충무항에'다. 통영 출신 김성술씨가 작사해 김해일이란 예명으로 발표했었다. 가사는 충무항을 소재로 삼은 것만 빼면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곡은 똑같다.

저작권 침해 소송에 휘말렸던 이 노래는 2006년 3월 가사에 대해 일부 표절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져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슈퍼스타 조용필이 아니었다면 이 노래가 80년대 이후 수많은 일본가수들과 대만가수 등려군까지 취입한 아시아의 명곡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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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