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광인 사이의 산만한 핑퐁게임어린이용 코미디가 계몽 영화로 둔갑하는 당혹감가벼운 주제에 무거운 역사의식 담아 불균형 심화

한국경제 위기설이 작년 화두였다면, 올해의 화두는 한국영화 위기론이다.

위기는 지표의 발표와 함께 점령군처럼 지면을 장식하고 우후준순으로 보도되면서 전파된다.

위기론은 한국영화 점유율의 하락과 관객 수 감소를 무기로 여론을 장악한다. 하지만 한국영화 점유율 증가라는 장밋빛 환상에 덮여 가장자리로 밀렸지만 이미 작년에도 한국영화순익은 마이너스였다. 소수의 흥행 성공작이 다수의 흥행 실패작의 손실을 만회하지 못했던 것이다.

앞으로 위기의 처방이 전문가의 혜안과 비전문가의 직관으로 대량생산될 것 같다.

달시 파켓은 한국영화에 대해 몇 가지 조언했다.

한국영화는 ‘때깔이 좋지만 잘 만들어진 코미디는 부재하고, 독립영화는 자기내면에만 파고든다’고 꼬집었다. 그의 지적대로 장르의 실패와 독립영화의 정체성 위기와 과잉된 비주얼 의존도의 증가는 한국영화 침체의 원인이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건들지 않은 한국영화의 아킬레스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독의 작가적 역량과 역사의식의 부재에 대한 지적이다.

역사의식은 너무 무거운 용어지만 구체적인 영화를 통해 말하자면 먼 이야기도 아니다.

예를 들어 임권택의 <짝코>에서 이창동의 <박하사탕>과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관통하는 역사의식은 ‘개인의 책임 회피와 역사에 책임지우기’로 요약된다. 즉, 개인의 불행은 모두 잘못된 역사에 그 책임이 있다는 태도다.

임권택은 이를 역사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인본주의로 승화시켰으며 이창동은 역사적 부채감을 개인의 트라우마로 은유하여 예술의 장에 진입했으며 강제규는 두 형제의 불행은 모두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책임론을 대중적 코드로 활용하여 1000만 관객을 동원하였다.

작가의 표지와 예술의 경지와 흥행의 보증 수표는 결국 ‘개인의 불행은 역사에 책임있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이들 영화는 한국전쟁과 광주 민중항쟁이라는 구체적인 역사를 활용하거나 대중영화에서 역사적 사건을 서사적 개연성 장치로 이용한다.

김현석의 <스카우트>가 1980년 광주 사건을 스카우트 실패의 책임사유로 슬쩍 집어넣었다면 정윤철의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도 예외가 아니다.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는 다큐 피디와 기행을 일삼는 기인의 이야기다. 수퍼맨 이현석의 기행은, 수퍼맨이라는 과대망상증의 원인은 1980년 5월의 역사적 사건에 기인한다.

수퍼맨은 하늘을 날아서 비행기 승객을 구하고 붕괴된 댐을 봉합하는 초인이 아니다. 관객은 수퍼맨 명찰을 단 바보같은 기인의 행적과 그의 병력을 추적하는 인내를 지불해야한다.

그는 1980년 5월에 총을 맞은 정신과 환자 이현석이며, 단지 ‘남을 돕는 착한 어린이가 되자 수퍼맨처럼’이라는 아버지의 당부와 교통사고로 잃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타인을 돕는 일에 몸을 바친다.

초인에서 광인으로 전락은 1980년 5월의 총상으로 의학적 판명이 났으며 모든 기행의 기원은 5월의 역사적 사건이다.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이 지점에서 SF의 장르에서 리얼리즘으로 장르 변환되며 동시에 광인의 기행을 다룬 코미디에서 역사의 상처로 인해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는 영화로 자리바꿈한다.

진지한 주제의식의 삽입은 어린이용 코미디가 갑자기 유신시대의 계몽 영화로 둔갑하는 것 같은 당혹감을 준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줄다리기는 수퍼맨이 의인과 광인의 핑퐁게임을 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이 영화의 가벼움과 무거움, 계몽적 태도와 유희적 자세는 시계추처럼 오고가면서 미학적 완성도 보다는 서사적 산만함에 일조한 것 같다.

정윤철은 <기념촬영>으로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스타 감독으로 부상하였다. <기념촬영>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친구를 잃은 여학생의 눈으로 그 참사를 기억하는 영화다.

부재의 시간과 기억을 영화적 언어로 잘 풀어낸 역작으로 김삼력의 <아스라이>에서 주인공이 감동적으로 보았다는 단편영화가 <기념촬영>이다. 그 후 그는 공중파 다큐멘타리를 소재로 한 <말아톤>으로 흥행감독의 자리에 올랐으며 <좋지아니한가(家)>로 대안적 가족을 모색하는 논쟁적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간지에 영화평론가들을 인터뷰하거나 본인의 인터뷰와 글을 게재하면서 스타감독에서 만능엔터테이너로서 폭넓은 행보를 보였다.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전지현과 황정민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 캐스팅과 국내최대의 투자 배급사인 C J 엔터테인먼트의 지원으로 화제가 되었다.

메이저 회사와 스타 캐스팅은 자타가 희망하는 최적의 제작조건이다. 좋은 제작조건이 바로 명품생산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허다한 경우는 규모는 공룡이지만 내용은 지렁이에 불과한 성과를 내기도 한다.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는 감독의 장기인 다큐멘타리를 선택하여 서사적 안정감을 준다.

송수정(전지현 분)은 다큐멘터리 피디이며 수퍼맨(황정민 분)은 자신의 카메라를 찾아준다. 전지현이 연기한 송수정은 ‘예의없지만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로 남성 관객을 사로잡았던 전지현표 연기’를 펼치기에는 극중 배역이 다소 진지했다.

황정민이 연기한 수퍼맨은 위기의 순간에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무서운 힘을 소유한 수퍼맨이 아니라 착하지만 힘없는 의인이며 생활 속의 환경운동가로 계몽적 인물이다.

미국영화 <수퍼맨>은 대중문화의 영웅으로서 우리시대의 잃어버린 영웅을 되찾아주며 누군가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대다수 관객에게 구세주의 이미지로 자리한다. 하지만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영웅의 옷이 벗겨진 자리에 역사적 상처를 입은 정신병 환자의 병적기록부만 클로즈업으로 남아있다.

한국관객은 이 영화에서 할리우드 수퍼맨이 주는 환타지를 만날 수 없으며 한국현대사의 희생양과 자생적 환경운동가의 우울한 초상만 스크린에서 대면하게 된다. 상처에서 치유되고 자기 희생으로 소녀를 구하면서 인간적 수퍼맨이 탄생하지만 관객이 바라는 영웅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수퍼맨이 태어나기 위해 치룬 댓가는 지나쳤다.

희생의 목록은 서사적 중복과 영화적 인용과 환상의 파괴로 기입할 수 있다. 환경과 역사과 재개발의 기억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기에는 광주에서 총격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수퍼맨이 감당하기에는 과도했다. 과욕은 이야기의 자연스러움을 해치며 서사적 파행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 영화 역시 이와 같은 사실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 같다. 더욱더 문제적인 것은 환경과 역사와 한국적 수퍼맨의 탄생이라는 큰 과제를 집어넣기에는 영화의 용량이 너무 작았다. 작은 양말에 집어넣은 거인의 발처럼 기형적인 불균형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방해하고 있으며 그동안 축적한 감독의 연출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정윤철 감독은 환경과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의욕의 건재함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대중영화로 포장하는 것에는 소홀한 것 같다. <수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스타였던 감독’의 뼈아픈 자기 성찰의 부메랑으로 날아올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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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 cinemh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