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롱한 진정성을 사로잡다빨강 풍선에 담긴 인간애 발견하면 대만 거장의 예술혼이 가슴에 살포

대만 영화는 소멸되고 있지만 대만 감독은 건재하다. 대만은 자국 영화 제작률이 경이적으로 낮은 나라 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영화에서 대만을 빼놓고 언급하는 것은 차 떼놓고 장기두는 일 만큼 허전할 것이다.

대만은 에드워드 양, 후 샤오시엔, 차이밍량, 이안으로 이어지는 거장들이 포진해있는 감독 강국이다. 이안과 에드워드 양은 작품성과 대중성에 성과를 거두었지만 후 샤오시엔과 차이밍량은 대중성을 외면하고 소수 관객의 지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대만 영화의 자국영화 점유율은 낮아지고 감독은 거장의 명성으로 예술영화 시장에서 활로를 찾아갔다.

후 샤오시엔의 이름에는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그의 무게감에서 발원한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목록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기입하였다.

필자는 후 샤오시엔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을 갖고 있다. 첫 번째 기억은 부산국제영화제다. 그는 평범한 복장으로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으며 필자는 객석에서 그의 한 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달변은 아니었지만 인상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 말은 요약하자면 ‘나는 관객을 외면한다. 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게 되면 무장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한다’라는 연출관이었다. 그 한마디는 대표작 <비정성시>보다 감독 후 샤오시엔을 잘 표현해주었다.

두 번째는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이 쓴 한겨레 신문의 글을 통해서 후 샤오시엔을 만나게 되었다. 정성일은 특유의 활달한 문체와 감정을 건드리는 어투로 후 샤오시엔과 만남을 가슴 뭉클하게 표현하였다.

글의 내용은 조각난 기억을 동원하여 풀어보자면 두 문장으로 집약된다. 한국의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 지칭되는 정성일에게 후 샤오시엔 감독은 ‘영화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넌지시 말했다.

정성일은 이와 같은 숭고한 영화론의 소유자인 후 샤오시엔과 그의 작품을 동시대에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격하고 감사했다. 영화를 통한 두 영혼의 만남은 영화가 동시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세 번째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스토리>에서 만났다. 그는 소처럼 우직한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애인의 스토커에게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버려진 텔레비전 화면에서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였다.

이 장면은 눈으로 날아드는 날카로운 비수같은 섬뜩함을 주었다. 세 가지 기억은 감독 후 샤오시엔의 필모그라피 보다 그의 영화세계를 선명하게 요약해 주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시골 소처럼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영화는 흰 명주천에 배어나오는 연민의 눈물같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때묻지 않은 소년과 잃어버린 근원적 순수를 일깨워준다면 후 샤오시엔은 우리가 놓쳐버린 일상 속에 늘 자리하고 있는 진정성을 포획한다.

후 샤오시엔의 영화 주인공은 성실한 바보와 가깝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손해보고 고통받지만 관객은 지지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애통해 한다. 주인공은 연민의 전도사다.

후 샤오시엔의 영화는 즉물적으로 이런 서사를 떠오르게 한다. 주인공은 시외버스가 하루에 두 세 번 밖에 운행되지 않은 시골 학교 학생이다.

그는 선생님이 일찍 학교에 등교하라는 말에 아침식사도 거르고 학교에 나와 혼자 교실에 앉아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출근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다. 약속을 지키는 학생은 교실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관객은 바보의 고통에 연민을 느낀다.

약속을 지키는 바보는 약속준수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학교 열심히 다닐 것을 당부했던 선생님은 진수성찬에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천천히 학교에 나온다. 바보의 성실성은 연민과 감동을 동시에 발산한다.

후 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식 순수와 후 샤오시엔 식의 연민이 절반씩 섞여있는 수작이다. 중국 인형극을 공연하는 수잔은 이혼녀이며 삶이 버겁다.

그녀의 아들 시몽은 부모의 빈자리로 인해 외로우며 베이비시터인 송팡은 고국을 떠난 외국 생활이 힘겹다. 그들은 모두 빈 마음의 공백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을 허공을 떠다니는 풍선같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만 풍선은 정해진 거처없이 떠도는 유목민이다. 시몽과 송팡은 현실과 영화를 넘나들고 있으며 수잔은 직장과 가정을 오가지만 마음의 뿌리가 내리지 않는다. 풍선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허공의 빨강풍선을 발견하게 된다.

빨간 풍선은 늘 허공에 떠돌며 그들 주위를 부유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정박시켜준다.

이 역설의 순간, 영화는 일상의 세계에서 예술의 세계로 넘어간다. 후 샤오시엔은 알베르 라모리스의 동화 <빨강 풍선>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마지막 자막에도 “빨간 풍선의 알베르 라모리스 감독을 기리며”라고 헌사로 경배한다.

알베르 라모리스는 동화적 세계에 집중한다. 라모리스는 소년과 초능력을 가진 빨강풍선의 소통과 경이로운 하늘 여행이 주는 반전을 강조한다. 하지만 후 샤오시엔의 풍선은 이웃과 싸우고 뭔가 허기지는 실제 현실을 우직하게 견인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시몽과 송팡과 수잔의 삶의 공간은 그들의 주위를 떠도는 빨간 풍선으로 인해 예술의 공간으로 문패를 바꿔달게 된다. 빨간 풍선은 분명한 주인공의 친구지만 동시에 스크린 안과 밖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삶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예술의 이름이다.

이 순간 이 영화는 갑자기 예술의 지위를 얻게 되고 관객은 성공한 예술이 주는 위로와 치유와 소통의 전리품을 얻게 된다. 후 샤오시엔이 거장의 칭호를 얻게 된 한 가지 이유를 우리는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순간에서야 뒤늦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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