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만 되면 수액 빨려 서글픈 신세

올 겨울은 물러가기가 싫은 모양이다. 춘삼월이 코 앞인데 머뭇거리고 있어 폭설주의보가 날아들고 출퇴근길이 뒤엉키곤 하니 말이다. 그래도 눈발 끝에 부는 바람은 한결 부드럽다.

눈이 숲에 쌓이면 그 눈이 녹아 마른 대지에 스며들 것이고 나무들은 그 물을 빨아 올려 새로운 생명의 봄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렇게 봄이 되어 언 땅이 녹고,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고로쇠나무 생각이 난다. 이 나무는 단풍나무집안의 식구이니 아름답게 물드는 가을이 제철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한창 물이 오르고 있을 나뭇가지의 탄력이나 부드러운 땅과의 감촉으로 봄의 기운을 느끼는 그 즈음이면 이 나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사실 물이 오른다 함은 나무로써는 비로서 생기가 돌고 그래서 새로운 성장에 대한 희망으로 설레이는 엄숙하고도 감동적인 순간이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는 고로쇠나무의 양분이 될 수액을 가로채 마시는 새로운 재미와 즐거움이 된다.

이즈음 산엘 가면 자주 만나는 간판의 하나가 고로쇠나무 수액(樹液)을 판다는 내용이다. 이른 곳에서는 이미 수액 채취를 시작했을 터이니 훨씬 일찍 봄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이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수액으로 워낙 유명하니 고로쇠나무라는 이름은 익숙할 터이지만 식물로써 잘 아는 이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로쇠나무는 단풍나무와 같은 집안의 나무이다.

잎이 단풍나무처럼 5~7갈래로 크게 갈라져 있으나 그 갈라진 결각의 가장자리엔 톱니가 없어 잎으로 구별이 가능하고 가을엔 붉은색 보다는 노란색으로 물드는 경우가 더 많아 조금 다르다. 열매는 물론 이 집안의 특징을 따라서 2개의 날개가 달려있다.

그리고 꽃은 우산살처럼 둥글게 달려 바로 이봄에 노란빛으로 곱게 피어난다. 하지만 잎도 없이 피기 시작한 이 수줍운 꽃들을 눈여겨 보고 알아주는 이는 드물고 보니 오직 몸에 좋다는 나무 몸 속 물에만 관심을 둔다면 나무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수액이란 나무의 도관을 흐르는 액체를 말한다. 봄이 되어 새로운 생명활동을 시작한 나무들이 땅속 뿌리에서 물을 빨아들여 잎 끝으로 증산하는 그 중간과정에 있는 수액을 사람들이 중간에 일부 덜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마시는 고로쇠 수액인 것입니다.

수액이란 모든 나무에 다 흐르지만 특히 고로쇠나무를 비롯한 단풍나무 집안의 수액이 많고 달다. 캐나다 국기에 나오는 잎이 있는데 이 역시 단풍나무 집안인 설탕단풍이며 그 나라를 여행하면 흔히 파는 메이플시럽이란 것도 바로 이 수액을 졸여 만든 천연 당분이다.

산에 갔다가 링거주사를 꼽고 있는 환자들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채취통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여서인지 정해준데로 나무의 굵기에 따라 한 두개의 구멍정도만을 뚫으면 나무가 약해지지 않는다는데 언제나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이 문제이다. 정작 고로쇠나무 수액의 효과는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지 않지만 잎이나 뿌리를 지혈제나 관절에 좋은 약으로 쓴 기록들은 있다.

부디 이 봄엔 고로쇠나무 희생으로 나온 물맛을 마음을 파지 말고 봄의 노란 꽃송이들이 소박한 아름다움과 이내 푸르게 커서 노란 가을빛으로 그윽하게 퍼져나갈 나무의 생명으로 장한 모습에 마음을 나누며 행복했으면 싶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