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자국에선 한때'퇴폐작가'로 취급… 세계 미술계에선 격찬 받은 황금대작

어딘가 눈에 익지 않은지? 얼마전 ‘가짜 신정아 연서’ 소동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그림이자 모 방송사의 TV드라마에도 등장해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화제의 그림이다.

오스트리아의 대표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가 그린 1908년작 <키스>다. 클림트의 유작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전성기의 명작이다.

<키스>에는 작가가 가진 에로티시즘의 표현과 독특하고 무절제한 장식성이 절묘하게 섞여있다. 생생한 색채와 관능적인 감각세계, 화려한 기하학적 무늬의 장식 등이 특히 돋보인다.

동심원과 네모, 약식적인 꽃, 담쟁이덩굴 등이 소용돌이치며 화면을 채운 가운데, 이를 배경으로 자리한 등장인물 남녀의 독특한 자세가 두드러진다. 서로 가까이 붙은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포즈의 구도와 남성의 강렬한 포옹, 그리고 여인의 황홀한 모습에서 발산되는 사랑의 느낌과 탄탄한 구성이 균형을 이룬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를 상징할만큼 유명한 작가지만 생전의 삶은 평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62년 보헤미아의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정통미술학교가 아닌 응용미술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7형제 중 둘째. 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에 입학, 금세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로부터 단숨에 유망주로 지목되었다.

1883년에 학교를 졸업, 이후 많은 작품활동을 통해 이미 뛰어난 장식 화가로서 비엔나 문화계의 전면에 세워진다. 1897년에는 [비엔나 분리파]를 창설, 초대 회장에 선임된다. 이후 8년 간 20여회의 전시회를 펼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계에 새 불씨를 지핀다.

1903년은 클림트에게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한 치욕의 해다.

그의 강렬한 에로티시즘의 표출에 대해 이미 서서히 반감을 보여오던 자국내의 반응이 급기야 폭발의 순간을 맞는다. 특히 표적이 된 것이 이 해에 발표한 [법학]이다. 정부와 비평가들은 물론, 대중 여론에까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 식의 혹독한 비난세례를 받는다.

사실상 ‘퇴폐적인 외설작가’로 추락, 낙인이 찍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바깥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로부터 금상을 수상, 로댕은 클림트의 작품에 대해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클림트는 1905년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한 후, 자신만의 세계에 본격 집중한다. 그리고 1907년 이탈리아 여행을 기점으로 작가로서의 최대 황금기를 맞는다. <키스>는 바로 이 황금시대에 거둔 수확이다. [키스]의 발표후 그의 그림세계는 새 단계에 접어든다. 이전에 비해 색채에 많은 의미가 부가되었고, 간간이 나타나던 화면의 정사각형 형태가 거의 고정되었다. 회화의 소재도 바뀌어 풍경과 초상화가 주류를 이뤘다.

말년의 그는 일 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 년의 절반은 작업실에서, 나머지 절반은 연인과 함께 호반에서 고요한 휴식과 명상을 즐겼다.

그 호반을 걸으며 이 ‘세기의 대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중 스페인 독감에 걸려 평생의 연인 에밀리에가 지켜보는 가운데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현실 너머 세상과의 기나긴 키스였다. 캔버스에 유화. 180х178cm. 오스트리아 빈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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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