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때면 미국으로 몰려드는 언어연수 행렬… 도대체 교육 본래 목적은 무엇일까

일교차가 심한 켈리포니아의 봄을 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지금 내 주변은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아픈 사람들로 넘쳐 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까지 들이마신 감기약이 몇 통인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평소 잔병치레가 많아 나를 많이 걱정시키는 동생 “현” 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역시 짐작대로 이불 세 채를 뒤집어쓰고 떨고 있다면서, 방금 전 한국에서 온 전화 때문에 한걱정이라고 하소연이다.

사연인즉, 한국 고향 동네에 아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6개월 정도 자기 집에 와서 지내면서 영어 연수를 해야겠다고, 밥 빨래도 다 하며 식모처럼 섬길 테니 데리고만 있어달라고, 거의 막무가내 통보 반 애원 반 매달리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사정이 딱하긴 했다. 정식도 아닌 임시 교사직에, 게다가 영어도 아닌 ‘사회과’ 에 지원하는데, 최소 6개월의 현지 영어 연수경력이 없어서 서류 심사도 통과 못했다나.

하지만 이런 사정을 듣고 마음 아파하는 것과 6개월간 동고동락 해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그 고향 분은 잘 모를 것이다. 미국에 연고가 있어 잠시 더부살이하다가 가는 고국 분들, 기왕 차린 상에 수저 한 벌 더 놓으면 되는 일 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여긴 한국처럼 발달된 대중교통이 뉴욕과 같은 몇몇 대도시 제외하고는 없다. “발”(자동차)도 없고 언어소통도 안 되는 사람을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정착을 도와주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일없이 한가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경제적인 부담도 무시 못 한다. 잠시 있다 가겠다는 반가운 손님에게 돈 내 놓으라 할 수 도 없는 일이고, 간혹 간청에 못 이겨 조기 유학 온 친척 아이 ‘기본 유지비’ 정도만 받고, (한 달에 한 사람 당 150 만원 받아도 별로 남는 것 없다고 들었다), 정성껏 돌봐주어도 끝에 가서는 좋은 소리 못 듣는 경우도 적지 않다 들었다.

현이 전화에 자극을 받아 그 동안 모아두고 미처 읽지 못했던 영어교육 관련 한국판 기사를 읽어 보았다. 대학 학비 따라 가려 하는 비싼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영어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유하나로 복권 추첨을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한국의 사립 초등학교들.

김포 ‘외고’ (‘외대’가 아닙니다!) 입학 취소시비 때 땅바닥에 누워 절규하는 학부모들. 그리고 영어 연수하겠다고 영어권 나라 마사지 숍에 자진해서 팔려가 인생 망가진 넉넉지 않을 것이 분명한 어떤 집 딸내미 얘기. 이정도면 영어 열풍이 아니라 광풍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광풍에 기름을 부은 것은 최근 있었던 “영어 몰입교육” 논쟁이다.

영어를, (그리고 점차적으로 다른 과목도), 영어로 가르치자는, 그래서 고등학교만 나와도 영어로 기본적인 생활영어가 가능케 하자는 교육 개혁안. 이 개혁안 불똥이 태평양을 건너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단칸방 세 사는 “현” 에게까지 튀어서, 연수 올 테니 뒤 좀 봐달라는 교사지망생 전화를 이달 들어서만 두 건이나 받았다 한다.

단일 민족 단일 언어로 영어 못해도 아직 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오던 우리에게 이 광풍이 웬 일인지, 어디서 어떻게 불어온 바람인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원봉사 원어민 교사가 시범 영어수업을 하고 있다.

영어는 국가 경쟁력, 더 노골적으로 말해 ‘힘’이요 ‘돈’ 이라는 논리. 이것 맞기도 하구 틀리기도 한 말이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비즈니스, 외교 분야 등에서 실무능력에 영어까지 겸비한 인재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이 안 될 것이다.

사실 세계화를 피부로 실감하게 하는 것은 영어로 하는 인터넷의 세계. 여기서야말로 영어는 정보이고, 정보는 힘이요 돈이다. 한국사는 우리 언니가 미국에서 시판되는 “C" 라는 지방분해제를 구해 달라기에 인터넷으로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다.

클릭 몇 번 만에, 한 병 15달러 정도면 주문구입이 가능한 것을 가지고 엄청난 폭리를 취한 비만 클리닉의 횡포가 한눈에 드러났고, 더 중요한 것은 영어권 소비자들이 올린 부작용 사례를 읽고 구입 자체를 자제했다는 것이다. 영어 할 줄 몰랐으면 돈 잃고 건강 해칠 뻔 했다.

영어만 되면 인터넷에 널려있는 정보와 자료로, 그것도 번역 요약을 거쳐 남의 ‘손을 탄’ 자료 (secondary sources)가 아닌, 저자의 정신과 향기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일차자료 (primary sources)를 가지고, 이곳 박사학위 소유자 부럽지 않을 실력을 혼자서도 닦을 수 있다.

영어능력이 현금으로 바로 보상되는 부류도 소수지만 있다. 예를 들면 전 직원 평균 연봉이 7억이 넘는다는 이중 언어 가능한 한국의 모 미국계 증권회사 직원들.

아쉽게도 ‘다른 나라’ 경쟁력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영어가 힘이요 돈인 것 맞긴 맞는데, 영어로 한 몫 하는 경제, 정치 엘리트들이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몇% 나 되는지, 그리고 인터넷 영문 정보 읽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데 얼마의 돈과 시간이 투자 됐는지 생각하면 (그냥 바가지 쓰고 사는 것이 비교도 안 되게 싸게 먹힌다!), 영어가 제2언어(English as Second Language)도 아닌 우리나라 고졸이상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생활영어를 해야만 할 이유가 딱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참고로 세계를 내 집 삼아 엄청 돌아다니고자 하시는 한국 관광객님들 영어 못하셔도 ‘돈 쓰는’ 데는 별지장 없습니다. 혹여 ‘돈 벌려고’ 외국어 시작하시려는 분들, 영어 보다는 중국어가 배우기도 더 쉽고 장래성 있는 장사 아닐까요?

영어 광풍의 핵심에 자리한 것은 사실은 '함께 사는' 사회를 건설해 나갈, 그런 건강한 민주사회 시민을 양성해야 할 원래 교육목적의 왜곡 또는 실종은 아닐는지. 신정아씨 사건으로 불거진 가짜 학위 소동에서 드러난 한국의 간판 만능주의.

새 정권 출범 후마다 고질병처럼 재발하는 ‘학연’ 시비. 이처럼 교육이 부와 신분의 유지와 이동의 도구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자식의 ‘더 나은,’ 아니면 최소한 남의 자식보다 ‘못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희생을 마다 않겠다는 부모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욕심에서든, 걱정에서든, 그 근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사교육에 조기유학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학부모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기에,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새 정부의 명분, 효과성 논란은 차지하고, 기본 취지에 있어 일단은 동감이다. 한데 내가 정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교육비” 라는 말 자체가 사치일 수밖에 없는 빈곤층 자녀들이다.

한 시간에 십만 원 주고 원어민 교사와 일대일 영어 과외 하는 강남 사는 내 친구 초등학생 아들과, 또래 나이 영어 “영” 자도 모르고 마냥 즐겁게 뛰노는 가난한 목사 딸인 조카 “윤”이를 비교하며 남몰래 속상해 한 적이 있다. “

서울대” 학생 대다수가 소위 “사”자 달린 집 자제라던데,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사랑하는 조카딸의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새 정부 관계자님들, 영어몰입교육으로 빈곤의 대물림의 고리를 끊을 자신 있으시면 제발 그리 하십시오. 한데, 간판이 아니라 실력, 실력보다는 인간됨이 대접 받는, 그런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가 먼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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