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은유와 상징, 파격으로 관객 사로잡은 오브제극

그로테스크한 마임처럼 공연이 시작된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상연중인 연극 <레이디 맥베스> 주인공 레이디 맥베스는 주체할 수 없는 권력욕으로 남편 맥베스를 부추겨 던컨 왕을 살해하게 한, 사실상 배후의 사주범이다. 그러나 왕후의 자리에 오른 뒤 매일밤 심각한 몽유증세로 고생한다.

궁중전의와 시종들은 최면 요법을 비롯해 갖은 방법을 다하여 그녀를 치료하려 시도한다. 나날이 병세가 더욱 악화되던 어느날, 몽유와 최면의 혼돈 속에서 그녀는 무의식중에 전의와 시종들 앞에 자신이 가슴 깊이 묻어 온 비밀을 재현한다.

왕권찬탈의 모의와 살해 전후에 관련된 섬뜩한 비사다. 전의가 최면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끝까지 묻어두고 있던 범죄를 어떻게든 은폐하려는 본능과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괴로움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고통과 혼란을 겪는다.

마침내 이 숨은 죄의식은 정체를 드러내며 레이디 맥베스와 정면으로 마주서게 된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선택은 온당했다. 예술의전당 개관20주년 기념 공연작으로 선정된 <레이디 맥베스>가 초연 10년만에 관객들과 재회하며 환호를 받고 있다.

한태숙 연출의 <레이디 맥베스>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만큼 과감한 비틀기와 파격적인 연극적 어법이라니, 과거 10년 전 초연무대에서 당시 관객과 평단이 느꼈을 충격파가 얼마만한 것이었을 지 짐작할 만 하다.

실제로 1998년 당시 이 작품은 ‘재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불경스럽게 희곡을 반토막내며 세익스피어의 원작과 명성을 훼손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바로 이 ‘간 큰’ 연출가 한태숙의 파격이 비로소 재평가받고 있다.

작품은 도처에서 강력한 개성을 내뿜는다. 미술, 음악 등 퍼포먼스적 요소를 사용한 오브제극(물체극)이란 점에서 가장 눈에 띈다. 밀가루와 흙 등을 사용한 미술 행위를 비롯해 타악과 현악 등이 주는 극적 긴장감을 적극 활용했다. 사실상 극의 이미지 전체를 주도하며 대사 이상의 호소력을 발휘한다.

철저한 인물 중심, 심리 중심의 공연으로도 남다르다. ‘벌거벗은 연극’이라고 부르고 싶을만큼 극히 최소한의 장치만 펴놓은 채(사실 무대 세트랄 것도 없다) 극중 인물의 내면에 관객들의 시선을 정조준시킨다. 5명 안팎의 인원이 등장, 그러나 배우마다 제 값을 초과하는 열정어린 연기를 선사한다.

레이디 맥베스 역에 서주희, 궁중전의 역에 정동환이 출연한다. 이영란, 박재천, 김민정, 홍승균, 권겸민 또한 각각 오브제, 악사, 구음, 키다리, 난쟁이 시종 역으로 등장해 주연 못지않은 연기와 역할로 극을 탄탄히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이영란과 박재천, 김민정은 스스로 창작자이면서 직접 배우로도 등장해 연출의 의도를 적확하게 살려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동환의 중후하고도 자연스러운 고전연기 또한 눈길을 끈다.

상연시간이 약 1시간20분. 군더더기 없이 보여줄 것들만을 보여준 뒤 좌중을 압도하며 막을 내린다. 혼란에 빠진 레이디 맥베스의 절규 뒤에서 이를 더욱 부추기는 전의와 시종들의 독특한 몸짓과 집단적 속삭임 등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인상적인 설정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대중공연들이 뜨고 지는 요즘, 주류나 대세를 좇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이 작품은 환기시켜준다. 어설픈 말장난이나 관객용 선물 하나 주지 않아도 주말은 물론, 평일 공연까지 예외없는 이 만석행진이 무엇을 뜻하는 지 관객 내면의 소리에도 연극인 모두가 귀 기울여 봄 직하다. 공연은 13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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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