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관조하는 노랫말로 세상과 교감하는 음유시인

조동진의 이름 석 자에는 거장의 무게감이 실려 있다.

연주가와 작곡가로 12년의 야인생활을 보낸 그의 음악적 뿌리는 록이다. 느린 노래처럼 그는 출발도 더뎠다. 데뷔 후 독집 을 발표하는 데도 무려 13년의 장구한 세월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70년대 끝자락에 발표된 그의 데뷔음반은 오랜 준비기간 만큼 묵은 장맛처럼 발효된 노래들을 담은 명반이다.

자신을 알리는 홍보가 곧 성공의 미덕인 대중음악계의 관점으로 보아 자신을 드러냄에 인색한 그는 특이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야인시절은 그렇다 치고 세상에 알려진 후에도 그는 TV등 주류 무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가요계의 기인'으로 비쳐졌다. 1966년 미8군 록밴드로 음악을 시작해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 리드 기타리스트와 작곡 활동을 빼고는 솔로 데뷔이전 가수로서의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본격적인 활동보단 자신만의 음악세계 구축과 음악적 내공 키우기에 지난한 세월을 보냈기 때문. 그의 대기만성은 특유의 과묵하고 나서기를 기피하는 기이한 성격 탓도 있지만 당대의 주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음악을 지향했기에 피할 수 없었던 예정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해보이지만 결코 소화해내기 쉽지 않은 곡들이다.

송창식, 양희은, 서유석, 김세환, 최헌 등 동시대 최고의 가수들조차도 그의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내질 못했다. 해결사는 결국 본인 자신이었다.

1978년 록 그룹 '동방의 빛' 멤버들과 이촌동 서울 스튜디오와 역촌동 오리엔트 스튜디오에서 데뷔음반 녹음에 들어갔다. 음악적인 야망보단 경제적 궁핍이 더 큰 이유였다고 한다.

출중한 음악공력으로 다져진 강호의 숨은 고수가 발표한 데뷔음반의 완성도는 이미 신인가수의 그것이 아니었다. 총 10곡이 수록된 1979년 대도레코드에서 발매된 초반은 제법 귀하고 1981년 신세계 재발매 음반은 30만장 판매량이 말해주듯 널려있다.

타이틀 ‘행복한 사람’은 70년대 초반 김세환이 먼저 취입했지만 활동 금지로 봉인되었다가 부활해 그의 대표 곡이 된 사연이 있는 노래다. 기획자의 의견으로 재 취입된 그 곡은 대박의 일등 공신이었고 가수 조동진의 화려한 탄생에 결정적 윤활유 역할을 했다. 그의 공식 등장과 데뷔앨범의 성공은 이후 대중음악계의 돌풍의 핵이 되었다.

조동진 1집은 오랜 음악적 내공이 응집되어진 결정체였다. 하지만 그의 출세작쯤으로 이 앨범은 평가한다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을 탐미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 앨범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거센 흐름을 대중음악계의 전면에 이슈화시킨 70년대와 80년대 음악의 분기점 같은 음반이었다.

‘행복한 사람’을 비롯해 ‘작은 배’, ‘겨울비’ 등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은 이 앨범을 불멸의 명반으로 각인시키기에 필요한 충분조건을 완벽하게 화학 작용시켰다. 오랜 무명의 때를 벗은 조동진은 이후 소위 ‘동아기획 사단’의 사령관으로 군림하며 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거목으로 급부상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조동진의 음악은 특유의 느릿하고 단순한 멜로디 진행으로 ‘졸립다’는 혹평과 ‘복잡하고 심오한 명상적 세계와 맞 닿아있다’는 찬사를 동반한다. 하지만 미묘한 감정의 실오라기 느낌까지 정교하게 풀어내는 무엇이 그의 음악 속엔 분명 꿈틀거리고 있음에 많은 대중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누가 그랬던가.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심오한 것이라고.

조동진은 저항적 이미지보단 삶을 관조하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세상과 교감하는 음유시인이다. 그의 노래는 마치 계절의 낭만과 자연의 향내가 그윽한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김민기, 한대수에 필적할만한 음악적인 역량에도 불구하고 금지여부에 무게감을 부여하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특수한 현실은 그에게 정당한 평가에 인색하게 작용했다. 그는 분명 일관되게 음악적 삶을 견지해온 흔치 않은 아티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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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