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인 100만 명 끔찍하게 살해된 인종 대학살 14주년추모 행사장서 절규하는 군중… 그렁그렁한 눈망울 속엔 희망의 속삭임도

“그래 다시 4월이다. 매년 4월이면 우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매년 4월이면 잊혀지지 않는 공허함이 우리 가슴 위로 내려앉는다. 매년 4월이면 나는 기억한다, 얼마나 삶이 빨리 끝나는 지를. 매년 4월이면 난 기억한다,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르완다 인종학살을 다룬 영화 ‘Sometimes In April (4월의 어느 날)’의 첫 대사처럼 지금 4월의 르완다 곳곳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4월 7일 해질녘 르완다의 아마호로 (AMAHORO) 스타디움으로 향하고 있는 슬픈 발걸음을 재촉하는 검은 잿빛 얼굴의 르완다 사람들에게도 흘러 내리는 빗방울만큼이나 가득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르완다의 대운동장 아마호로 (AMAHORO) 스타디움에서는 4월 7일 1994년 있었던 르완다 인종학살 사건에 대한 추모 행사가 정부 주최로 열렸다. 전체 인구 800만 명 중 1/8이나 되는 100만 명의 사람들이 끔찍하고도 잔인하게 목숨을 잃은 인류 사상 최대의 대량 학살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였다.

스타디움 가득히 죽은 피를 의미하는 보라색 스카프가 목덜미에 매어진 채, 많은 사람들은 힘없이 울려 퍼지는 애절한 가락에 두근거리는 심장 박자를 맞추어가며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기억 너머 가라앉아 있던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들을 내뱉는 인종학살 생존자들의 표현이 어두운 밤에도 더욱 선명하고 분명해져 들릴수록, 한마디 한마디의 끔찍한 증언은 듣는 수많은 사람들을 오열케 하기에 충분했다. 곳곳에는 정신을 잃고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통역을 해주던 현지인 친구도 “미안해. 더 이상 못하겠어”라는 말과 함께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나에게 통역을 해준 현지인 친구 역시 1994년 끔찍한 아픔을 겪은 생존자였다. 2000년 7월에 발표된 르완다 재경부 통계 부서의 1994년 인종 학살 이후의 정신적인 피해현황을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의 구멍이 블랙홀마냥 뚫려 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생존자들의 99.9%가 폭력 현장을 목격했고, 79.6%가 가족을 잃었으며, 69.5%가 학살과 폭력을 보았다고 하니, 현재 15세 이후의 거의 모든 르완다 사람들이 1994년의 참혹스러운 아픔을 가슴에 지닌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상도 만한 땅 크기의 나라 르완다.

이곳에서 1994년 인종학살이 일어났다. 곳곳에서 인헤라함웨 (INTERAHAMWE ‘함께가다’라는 뜻)라고 불리는 후투족 시민군들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증을 매서운 눈초리로 살폈다.

부족 표기란을 일일이 검사해 투치족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같은 문화에 같은 언어에 같은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이웃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바퀴벌레네, 죽여 버려!”라고 목청을 높이며 잔혹하게 정글도로 내리쳤다.

여성들에게 행해진 강간행위 역시 극심했는데, 에이즈에 걸린 후투족 남자들은 투치족 여자들 뿐만 아니라 투치족과 결혼 한 후투족 여자들도 강간한 후에 잔인하게 죽이기도 하며 투치족의 씨를 전멸하려 했다.

이렇듯 어제 까지만 해도 이웃이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적이 되고 자신의 손으로 가족과 아이들을 죽여야만 했던 인간 이하의 처참한 몸부림은, 벨기에 식민통치 당시 식민 관료들에 의해 만들어져 이어져 오고 있던 신분증에 표기된 후투(Hutu), 투치(Tutsi), 트와(Twa)의 부족 구분으로 인하여 극과 극으로 생사가 갈려지게 하였던 것이다.

인종학살 14주년을 맞는 오늘, 르완다 정부는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에 한창이다. 14년 전 부족의 구분으로 생사를 나누었던 부족표기가 되어 있는 구 신분증을 없애고, 새 전자 신분증에 부족 표기 대신 르완다인(Rwandan)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제 르완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또 누구여야 하는 지를 고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무도 묻지 않고 묻을 수 없으며, 모두가 르완다 사람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안에서 살아있는 존재감에 대한 감사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자 주민등록증은 동아프리카 나라들 중 최초로 시도되는 최첨단 신분증이다.

아픔과 고통을 거름 삼아 더욱 새로운 소망과 발전의 꽃을 피우기 위해 르완다는 지금 새 길에 새 발자국을 남기며 달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는 당찬 20대의 포부를 갖고 도전했던 해외 봉사 활동에, 어느 나라로 갈까 고민하던 내게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르완다는 인종학살의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내 마음 속 깊이 가냘픈 손길을 내밀며 다가왔었다. 내가 르완다에 가면 그 고통과 아픔에 짓눌린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아궁이에 희망의 작은 입김을 불어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 낼 수 있겠다는 알 수 없는 희망찬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그 마음을 갖고 르완다에 도착한 지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르완다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편견들은 하나 둘 씩 깨지기 시작했다. 비참한 과거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도 키갈리 도시는 너무나 정돈되어 있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말쑥하기 그지 없었다. 어색한 영어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는 검은 얼굴빛의 보색으로 더욱 그들의 하얀 미소가 돋보였다.

과연 이곳이 14년 전, 인종학살이란 뼈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 곳인가, 과연 이들이 이웃과 가족을 무참히 학살하고 학살당한 슬픈 피해자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마음 속에 이는 의아함에 나 자신도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4월의 둘째 주간, 인종학살 추모기간이 되어서야 그들의 내면의 참 모습을 조금이나마 곁에서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들과 마음을 열고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로서는 그 고통과 슬픔의 상처를 보듬어 싸매 주기에는 너무 작은 내 손을 보며 나 자신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해외 무료 자원 봉사자로서 1년간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내가 속한 비정부 단체 NGO에서도 인종학살 추모 기간 관련 영화를 무료로 매일 밤 상영하였다. 영화를 보기 어려운 지역 주민들은 매일 밤 상영되는 인종학살 소재의 관련 영화를 보면서 지난 아픈 과거를 고통스럽게 추억해 가며 눈시울 붉혔다.

그들과 함께 앉아 가슴 시리게 섬뜩한 영화 장면에 두 눈을 찌푸리는 내 마음에도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14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들 가슴에는 커다란 마음의 블랙홀이 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들만의 어두운 마음의 구멍이 오늘은 더욱 크게만 보인다. 부모의 죽음이 눈동자 필름에 찍힌 채 지울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고아들이 르완다에 30만 명이나 있다고 한다. 난 누구인가 넌 누구였는가에 대한 윤리적인 답을 찾지 못하고 혼돈 속에 있는 인종학살 생존자들을 위해 생긴 정신병원은 수도 키갈리에만 2군데나 있다고 한다.

어두운 우주 속에 있다는 블랙홀보다도 내 주위에 있는 르완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블랙홀이 4월 비가 내리는 이곳 르완다에서 더 크게만 그리고 더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도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나의 작은 마음을 이들에게 보낸다. 비가 내리는 이곳 르완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 김혜린 약력

김혜린(20)은 명지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후, 아프리카 르완다로 봉사활동을 지원하여 비정부, 비영리 청소년 단체에서 무료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해외무료자원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혜린 haerin77@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