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오랜 풍속, '가회(嘉會)'에서 비롯한가회→한가외→한가위… 삼국사기 '가배회'의 준말중국 한나라 가회 최초 출전중국은 중추절, 한국은 추석2천년 전부터 음력 8월 15일 중시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올해 추석은 38년 만에 가장 이른 추석이라 한다. 8월 26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밝힌 바와 같이, 이번 추석연휴는 대체공휴일제도가 처음으로 적용됐다. 금년 들어 연이은 재해와 우울한 분위기가 만연한 와중에, 이번 추석 기간 동안 그러한 우울 모드를 일신하기 위해 추석과 관련한 몇 가지 사항을 경건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가위는 가회(嘉會)의 변형

현재, 음력 8월 보름을 이르는 '한가위'란 말에 대해서는 신라 유리왕 때의 '가배(嘉俳)'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돼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 신라본기(新羅本紀) 유리이사금조(儒理尼師今條)에는 이 嘉俳와 관련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유리이사금이 6부를 정한 뒤 이를 둘로 나누어 두 명의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서 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그런 다음 가을 7월 16일부터 대부(大部)의 마당에 일찍 모여 길쌈을 시작, 밤 2경에 파하게 하였다. 8월 보름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따진 뒤, 시합에서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을 축하하고, 이어 춤과 노래 및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지금의 학자들은 위 '가배'에 대해 '가운데(中)'와 같은 말로 본다. 그리고 '한가위'에서 맨 앞의 '한'은 '큰(大)'과 같은 말이니 한가위는 직역하면 '큰 가운데'를 뜻하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석과 큰 가운데는 의미상 서로 맞지 않아, 위 이야기 중 "춤과 노래 및 온갖 놀이를 嘉俳라고 하였다" 부분을 다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嘉(가)는 '아름답다, 즐겁다'를 뜻하고 俳(배)는 '광대, 온갖 놀이'를 뜻하니, 嘉俳는 '즐거운 춤과 노래 및 온갖 놀이'를 나타내는 말로, '큰 가운데'와는 전혀 무관하다.

문제를 풀기 위해, 조선 후기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풍속 편에 실린 다음 이야기를 더 살펴보자. 신라사(新羅史)에 이르기를, "7월 보름에 왕이 왕녀로 하여금 6부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넓은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해서 8월 대보름이 되면 그 성적을 따져 진 편이 술을 마련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춤추게 하였는데, 이를 가배회(嘉俳會)라 하였다. 즉,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면서 회소곡(會蘇曲)을 노래하였기 때문에 이를 '가회(嘉會)' 놀이라 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嘉俳會(가배회)'란 말이 있었고, 또 그것을 줄인 '嘉俳(가배)'도 있었고 '嘉會(가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추석절인 한가위에 대해 한자로 '漢嘉會(한가회)'라고 적었다. 이렇듯, 그동안 우리 후손들은 嘉俳(가배)에만 집중했지, 嘉會(가회)라는 말은 간과했던 것이다.

즐겁고 융숭한 잔치모임을 가리키는 嘉會(가회)의 최초 출전은 한(漢)나라 때 가의(賈誼: BC200~BC168)가 지은 <치안책(治安策)>이다. 그러던 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음력 8월 15일에 한정된 즐거운 잔치모임을 뜻하게 된 것은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 때부터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해와 거의 비슷한 때부터 약 2,000년 동안의 오랜 풍속이 '한가위'인 것이다.

정리하면, 신라 유리왕 때 '가배회'의 준말인 '가회'가 <역어유회(譯語類解)>上4에서 증명되듯 '가외'로 변음되었다가 또다시 '가위'로 변하였다. 세종대왕 당시 '노로'가 오늘날 '노루'로 변음되었듯, '가외'가 '가위'로 변음된 것이다. 음력 8월 15일날 '가배회=가회'를 하기 때문에 '가회→가외→가위'가 음력 8월 15일인 중추절을 뜻하게 된 것이고, 추석大보름을 나타내는 '한(大)'이 후에 덧붙어 '한가회→한가외→한가위'가 되었다.

추석은 '중추망석'의 준말

이웃나라 중국 또한 추석이 우리처럼 국가적 명절이자 연휴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秋夕(추석)이란 말을 쓰지 않고 仲秋節(중추절)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들 또한 '중추절'이란 동양 공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만의 토속한자어인 '추석'을 더 많이 사용한다.

문제는 우리가 말하는 추석은 비록 秋(가을 추)와 夕(저녁 석)이란 한자를 사용하긴 하지만, 당나라 시인 조하(趙嘏)가 지은 <장안추석(長安秋夕)>에서처럼 일반적인 어느 가을저녁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석 달 동안의 많은 가을저녁 중에서 음력 8월인 '仲秋(중추)'의 '望夕(망석: 보름날 저녁)'만을 지칭하니, 우리의 추석은 '중추망석(仲秋望夕)'의 준말이다.

참고로, 일본의 추석은 'お盆(오본)'이라 부르는데, 추석을 지역에 따라 음력으로 지내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양력으로 지낸다. 올해의 경우 양력 8월15일 전후의 2~3일, 8월14일부터 8월17일까지가 오본 연휴였다.

추석성묘 풍속은 가락국 때부터

음력 8월 대보름날인 추석은 조상의 무덤에 가서 잡초를 뽑고 청소를 하는 등 성묘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처럼 추석 때 조상의 산소를 찾는 풍속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오주연문장전산고> 풍속 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신라 유리왕 19년(42)에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이 즉위하였다. 수로왕에서 10대 구형왕(仇衡王)까지는 도합 491년이 되는데,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가락국에서는 시조 수로왕의 사당을 처음으로 수릉(首陵: 수로왕의 묘) 옆에 건립하고 1월에는 3일과 7일, 5월에는 5일, 8월에는 15일에 제사를 지내왔다. 구형왕이 왕위를 상실한 뒤에는 그 신하였던 영규(英規)가 사당을 빼앗아 비록 자격이 없음에도 제사를 계속해 왔는데, 어느 해 단오절에 사당에서 강신례를 진행하다가 대들보에 깔려 죽었다. 그 뒤에는 규림(圭林)이 계승하였다가 나이 88에 죽자, 그 아들 간원(間元)이 계승해 사당 제사를 착실히 받들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이 음력 8월 15일에 조상의 묘소를 찾던 풍속은 가락국에서 시작된 매우 유구한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들을 보면 추석을 지내는 절차가 아주 복잡했다. 오늘날엔 추석의 절차가 많이 간소화되었긴 하지만, 요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제수를 형편에 맞게 마련하고 재해를 당한 불우이웃들과 더불어 한가위를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