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박수근이 새롭게 전하는 말

'나무와 두 여인'(1962)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근심스러운 마음에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에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무를 저리도 꿋꿋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박완서 소설 '나목')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마흔 살이던 1970년 장편소설 '나목'으로 <여성동아>에 당선돼 작가의 길을 열었다. '나목'은 한국 전쟁 중 미군부대 매점 초상화 가게에서 일하는 여주인공 이경이 불우한 화가 옥희도를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전쟁 중 가난 때문에 미8군 초상화부에 취직했던 작가가 그곳에서 만난 박수근(1914∼1965) 화백과의 인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국 예술의 거목인 두 작가를 맺어준 '나목'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서있다. 그리고 신산한 시대에 '마음의 봄'을 찾는 이들에게 위로와 생기를 북돋워준다. 박수근 화백 50주기를 맞아 4월 30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국민화가 박수근' 전의 기운이다.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박수근 화백이 전쟁을 피해 고향(강원도 금성)을 떠나 월남해 정착했던 서울 창신동 일원에서 창작된 것들이다. 가난했지만 화가의 꿈을 키우며 가족들로 인해 행복했던 박수근은 그런 '현실'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겼다. 절구질 하는 아내, 과일 파는 행상, 거리의 오인, 모처럼 먹을 수 있었던 굴비, 책가방과 고무신 등 그때 그 시절의 모습들이 정직하게 담겼다.

'절구질하는 여인'(1954)
12살 무렵 "밀레를 닮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시선은 늘 노인, 어린 아이, 아낙네 등 약자들에 있었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어렵고 힘든 시대를 묵묵히 살아간 사람들의 꿈과 의지를 선하고 진실하게 담아냈다.

전시작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무와 여인'은 앙상한 겨울 나무 밑에서 아이 업은 여인이 서성이고, 짐을 머리에 인 여인이 총총거리며 지나간다. 빨래터의 여인들은 과거 우리들의 어머니이고, 나목 아래에서 노는 아이들은 오늘날 중년의 옛 모습이다. 그들은 순박하고 약해 보이지만 '봄에의 믿음'을 간직한 나목처럼 강인하다.

지극히 한국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박수근의 작품전이 최첨단 디자인과 미래지향적인 현대성의 상징인 DDP에서 열리는 것은 박수근 예술이 지닌 순수한 창조성을 확산하고 창신동의 장소혼(genius loci)을 재생하려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번 박수근전은 전시와 더불어 건축, 디자인이 융합된 프로그램과 창신동 일대를 답사하며 박수근의 삶과 예술을 시간도 갖는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입장료 성인 8,000원. 02-2153-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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