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준'정처 없는 여정-동행'전, 22일까지 여니갤러리

녹턴-별밤의 피아니스트, 73×73㎝, 2015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다. 붉디붉은 한 송이 꽃이 격렬한 몸짓으로 장렬히 산화한 후의 우수(憂愁)처럼 꺼뭇꺼뭇한 곡선엔 위로의 음자리가 꽃잎처럼 흩날린다. 달빛 흐르는 창(窓)너머 세상의 욕망은 가없이 뒹구는데 야윈 손길이 건반 위를 흐른다. 피로감에 젖은 나그네의 낯빛들을 다독이는 양규준 화백의 신작명제 '녹턴-별밤의 피아니스트'앞에서 불현 듯 오랜 전 만추의 계절을 이 한곡에 휩싸여 보냈던 그 강렬한 기억의 연주자가 떠올랐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정풍운동(整風運動) 등 영향으로 1958년 유학 중이던 폴란드에서 영국으로 망명했던 중국 피아니스트 후쫑(Fou T'song, 傅聰)이었다. 그가 연주하는 야상곡(Nocturnes)엔 조국 폴란드를 떠나 돌아오지 못했던 쇼팽(Chopin, 1810~1849)의 유랑여정에 대한 동병상련 공감흔적이 스며 있었다. 건반은 거칠고 토해 내듯 후끈하면서 동시에 생의 아름다움을 서정으로 물들이는 자애의 선율이 교차한다. 남태평양 섬 뉴질랜드에서 15년 동안 그림 그리다 2012년 한국으로 귀국한 양 화백의 이번 초대전 작품에서 그런 후쫑의 섬광이 번쩍이는 것은 실로 놀라운 해후라 할 만하다.

칼리그라프, 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정신

양 화백은 자연주의 심화작업에 대한 갈증으로 지난 1997년도 뉴질랜드로 이주한다. 낯선 환경과 문화 등에 대한 혼돈으로 3~4년이라는 꽤 긴 시간을 헤매게 될 즈음 남태평양의 폭포와 야자나무 무성한 자연 속에서 한국의 풍경이 오버랩(overlap)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피부색과 언어와 가치관의 다름을 뛰어넘는 자연이 품는 거대한 포용력과 따스함의 체험에서 '나'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라고 토로했다.

그 이후 인간과 존재의 담론을 담아 낸 '빛', 음양조화의 혼성메시지를 전하는 '중용'시리즈를 연속으로 발표한다. 2005년부터 화면에 등장하는 칼리그라프(Calligraph)는 하늘, 별, 구름, 은하수와 기억과 꿈결이 공존하는 여정이다. 작가는 "유년시절 할아버지 방에서 창호지문을 통해 들어오는 흐릿한 빛 속에서 꿈틀거리던 병풍글씨가 뉴질랜드에서 신기하게도 다시 떠오르며 나의 내면을 흔들어 깨운 정신의 징표가 되어 주었다"라고 말했다.

동행, 75×114㎝ Acrylic, spray paint on canvas, 2015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예술인마을' 전원 속에 작업실을 마련한 그는 올 4월 서울 관훈동 백송화랑 전시에서 생의 의미를 담담하게 풀어낸 '정처 없는 여정(A vagabond voyage)' 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화단의 신선한 주목을 받았다. 양규준 화백은 중앙대 및 동대학원과 뉴질랜드 화이트클리프(Whitecliffe) 미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신작 15여점을 선보이는 이번 초대전은 9일부터 22일까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소재, 여니갤러리(YUNI GALLERY)에서 열린다. (070)4367-6080


서양화가 양규준(Gyu-Joon Yang)

권병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