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獨 서양화가 한영준‥‘구겨짐-phenomenal’ 작품세계

그것이 무슨 대수라고? ‘스스로의 환상이 쳐놓은 매혹의 덫’이라는 날카로운 말을 남기고 홀연 사라져 간 그대. 보드랍게 스르르 손가락을 낄 땐 간드러졌었지. 형식은 어긋나고 익숙함은 조각조각 흩어졌어. 그 무색한 미소를 겨우 껴안았던 초저녁 수면에 어리는 아아 반항의…. 그리고 저 선명히 구겨진, 사과여.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랭보(A, Rimbaud) 시, MA BOHE`ME(fantaisie) 중에서, 김현 옮김, 민음사>

적막하다. 물이 길 되는 법을 배우지 않고선 저 수평선에 닿을 수 없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무리들이 물속으로 스며들었다. 스스로 젖으며 아른거리는 빛이 열어주는 물길에 떠가는, 아 가없이 흔들리는 것은 꽃잎이런가. 이름을 잊어버린 야윈 가벼움 위에 동그스름 사과 하나 그 우주가 깊은 포옹으로 속삭였다. 달의 상징에 자리한 노랗고 파란 고혹의 진자줏빛 사과. 오늘도 달은 뜨고 고요히 서성이는 옷자락사이 쇼팽(Chopin)의 ‘봄의 왈츠(Spring Waltz)’ 피아노 선율이 가늘게 파고들었다. 누군가 ‘셀 라 비(C'est La Vie, 그게 인생이야)’를 연발하며 너그러운 제스처를 보이고 지나갔다. “…모든 부재가 현전의 이면일 뿐이게 되는, 모든 침묵이 음향적 존재의 양상일 뿐이게 되는 선험적 장에 던져지게 될 때, 나는 일종의 원칙적 편재성과 영원성을 가지고 시작도 종말도 사고될 수 없는 소진불가의 삶의 흐름에 나 자신이 바쳐진 것을 느낀다.”<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 지성사>

◇융합, 추상적 사과 한지 우연성

재독(在獨) 서양화가 한영준(HAN YOUNG JOON) 작가는 경남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를 졸업하고 199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뉘렌베르크(Nurenberg)에 있는 미술명문 빌덴덴 퀸스테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에서 회화를 전공 졸업했고 22년째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인사동서 한지를 한 아름 사서 돌아갔다. 그리고 최근 새로운 작품을 들고 서울을 찾았다. “그동안 한지작업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매달렸다. 펜, 색연필, 파스텔, 아크릴 등 수많은 재료들을 실험해보았는데 역시 한지는 질감이 부드러우면서 내구성이 강했다. 그 과정에서 무척 흥미롭고 놀라운 발견들도 있었다. 아크릴은 물이 섞이는 작업이라 한지에 표현했을 때 물결처럼 올록볼록 올라오는 형태가 참 좋았다. 한지뒷면에서 스미어 나오는 우연성과 구겨진 바탕위에 작업하는 것도 신선했다”라고 밝혔다.

화면은 작가의 손길과 이러한 표현방법들이 결합되면서 추상적 사과이미지와 독창적 분위기의 풍경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융합은 구겨지지만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닌, 구겨졌지만 원형이 사라지지 않는 그리하여 소통, 일탈, 자화상, 다름으로써 더욱 도드라지는 것 등의 메타포를 함의한다. 오늘날 첨단정보가 제공하는 매끈하고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한 데이터시대에 ‘구겨짐’의 미학을 그는 어떻게 풀이할까.

“작품 속 사과는 그야말로 우리들 삶을 상징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다. 보고 만지는 사과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아련한 신비에 쌓인 어떠한 존재 일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이다. 늙어간다는 것이 단지 주름만 생기는 것만은 아니듯 고요한 바닷가의 명상, 핑크빛 사과가 가슴으로 훅 안기는 경이로운(phenomenal) 것들을 찬미하고 싶다.”

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작품캡션

△(좌)구겨짐-phenomenal, 64×92㎝ 한지에 크레용과 아크릴, 2016

△(우)64×92㎝

△서양화가 한영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