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 음식은 ‘가슴으로 만든 음식’… ‘원칙을 지키는 음식’지켜 나가

인사동 ‘두레’, 가회동 ‘취운정’운영…기본에 충실

‘취운정’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헛소문으로 마음 고생

20대 ‘두레’맡아 숙명 같은 음식 장사…한식 다운 한식

똑 같은 음식 없어…백화점에 비빔밥 파는 ‘두레’열어

매일 시장에서 식재료 사들여…정성과 원칙으로 식사 차려

빛이 있다. 이미 어둠은 깊었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의 어둠은 더 깊다. 어둠은 과거였다. 깊은 어둠의 골짜기를 헤쳐 왔다. 인사동 한식집 ‘두레’의 대표 이숙희 씨의 이야기다. 그녀의 빛과 어둠을 들었다.

통속적으로 표현하자. 소설 몇 권 분량 정도의 아픔과 이별을 겪었다. 밝은 부분도 강렬하다. 통속이 흔히 그러하듯이 참으로 통속적이다.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시간 예정한 인터뷰가 네 시간 동안 이어졌다. 엉킨 실타래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도 참 막막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까? 인터뷰 중간에 밥을 먹었다. 참 소박한 듯, 기품 있는 점심상이었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잠깐 뒤뜰의 장독대를 보여주었다. 정갈한 장들이 담겨 있었다.

취운정의 장독대에서

‘취운정(翠雲亭)’은 한식 부띠끄 호텔이다. 인터넷에서 뒤져보면 20여만원의 방부터 100만원에 이르는 방까지 소개되고 있다. 1박 130만원대까지 있었고 국내 호텔 최고가의 방이라고 소개된 적도 있다.

이숙희씨의 밝은 면이다. 국내 최고급, 한식 부띠끄 호텔의 주인. 빛은 강하다.

‘취운정’은 대한제국 시절의 구체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나들이할 때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그보다는 대한제국 시절 고급 관리들이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이 시회(詩會)를 열기 위해 건축한 정자로 서울 북부 제동(齋洞)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완흥군 이재면(고종의 친형)과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등이 발기하여 ‘취운정’을 관리들의 사교 클럽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도 보인다.(황성신문, 1909년 6월 1일자)

이 무렵 독립운동가 나인영과 더불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했던 해학 이기(海鶴 李沂)가 계동(桂洞)에 있었던 ‘취운정’에서 단군교 창립 발기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남아 있다.(해학유서)

‘취운정’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전 살았던 ‘가회동의 한옥’으로도 유명하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이숙희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이런저런 인연으로도 큰 아픔을 겪었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인사동 ‘두레’에 들렀던 적이 있다. 미혼인 이숙희씨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대선 전, 이숙희씨 소유의 가회동 집에 이명박 후보가 살았다. 이 3가지 이야기가 얽히면서 이른바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숨겨진 딸’ 이야기가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두레’에서 보거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단둘이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단둘이서 커피 한 잔 마신 적이 없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겉으로 다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아픔은 깊었고 상처는 긴 시간 아렸다. 별일 아니었다고 툭툭 털어내지만 그리 쉽게 아물 상처는 아니었다.

“대통령 되고나서는 정작 청와대로 한번 부르지도 않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소문이 무성했는데 청와대에 초청하기도 힘들었겠지요. 나중에 대통령 직을 끝내고 나서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만나지 말고 청와대 있을 때 한 번 부르지 그랬냐고.”

정작 섭섭한 내용은 따로 있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있었던 한식세계화였다. 엉뚱하게도 떡볶이를 한식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선정했다. 스캔들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음식을 만들고 음식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한식의 대표음식 떡볶이’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쉽게 시작한 ‘두레’로 삶의 방향을 잡다

‘두레’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믿었는데 나중에 보니 정해진 운명이었다. ‘두레’를 운영하면서 ‘인간 이숙희’도 음식과 더불어 쑥쑥 자랐다. 속도 많이 썩었지만 그만큼 자랐다.

경남 밀양 출신이다. 아버지는 지방 토호의 귀한 아들. 어린 시절 땅을 디뎌본 적도 없이 등에 업혀 다녔다. 흔히 지방 토호를 설명하는 문구가 있다. “내 땅 밟지 않고는 이 동네 못 다닌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바로 그러했다. 아버지는 한량(閑良)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루지 못할 사랑’의 관계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당시 교통요지였던 삼랑진에 음식점을 차려주었다.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음식과 더불어 기생들이 춤과 노래를 더불어 파는 곳이었다. ‘영락관’.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아버지를 만나, 스물아홉의 나이에 ‘영락관’을 시작했다.

삼랑진은 번화했다. 일제시대, 경부철도의 길목이자 한반도에서 착취한 물자가 구포 등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낙동강, 밀양강, 경부철도, 경전선 등이 몰려 있는 곳. 번화한 삼랑진의 요지에 ‘영락관’이 있었다. ‘두레’의 이숙희 대표는 어머니가 하던 음식점의 음식을 물려받았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지는 않다. 가게 음식보다는 어머니가 아버지께 차려내던 음식, 집안의 대소사 때 보았던 음식이 오히려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음식 잘 만지는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찾아가서 배웠다. 된장, 간장도 배웠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최고의 음식은 집안에서 보았던 갈치회다.

“갈치회가 폴폴 날아갈 듯이 고운 자태였습니다. 그걸 지금도 못 잊고 있습니다. 이젠 가르쳐 줄 집안의 어른도 없고, 혼자서 해보면 안 되고…. 모양새가 그렇게 날렵하게 나질 않습니다.”

엉뚱하게 ‘갈치’는 이숙희 대표와 인연(?)이 깊다.

집안에 흉사가 겹쳤다. 아버지의 사업이 서서히 기울다가 마지막으로 망했다. 아무리 부호 집안이라지만 끝없이 망하기만 하는데 당할 재주는 없다. 그 많던 재산을 다 털어먹고 드디어 사글세에 살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다고 했던가? 와중에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스물두 살. 생각해보면 참 철부지였다. 연극을 한다고, 노래를 부른다고 청개구리처럼 살았다. 집안 살림을 알 리도 없고, 공부도 고등학교 졸업에서 멈췄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느 날 갈치찌개를 끓였다. 아버지가 다시 끓이라고 했다. 다시 끓였다. 또 다시 끓이라고 했다. 세 번째 끓인 갈치찌개. 아버지가 상에 갈치찌개 냄비를 엎질렀다. ‘이런 아버지하고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어나기 전, 늘 산마와 계란을 넣고 만든 음식을 마련했다. 관솔불로 밥을 짓고, 폴폴 나는 갈치 회를 내놓는 밥상을 스물두 살의 청개구리 같은 처녀아이가 차릴 수는 없었다.

취직시켜주겠다는 친척의 말만 믿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은 차가웠다. 약속했던 취직은 되지 않고 영하 17도의 매서운 추위만 기다리고 있었다. ‘밀양불교학생회’에서 만났던 선배의 거처인 발산동 좁은 아파트 방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어둠은 깊었다.

“대학로에서 카페를 시작했습니다. ‘시ᄅᆡ’라는 카페였는데 당시 열심히 활동하는 젊은 화가부터 최고의 화가들이 찾는 명소였습니다.”

몇 해 만에 집을 한 채 살 정도의 돈을 모았다. 어둠이 지나가면서 스스로 배우고 싶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익혔던 민속춤, 서예, 꽃꽂이 등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실내 디자인도 엿보고 나중에는 ‘민학회’의 답사 등도 쫓아다녔다. 지금도 인사동 ‘두레’, 가회동 ‘취운정’ 등은 각종 꽃과 풀들로 뒤덮여 있다. 모두 이숙희 대표의 솜씨다.

“몇 해 동안 ‘이숙희 토털패션’이라는 보세품 가게를 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인사동 ‘두레’를 시작했지요. 1980년대 중반 무렵입니다.”

‘두레’, 원칙을 지키는 음식을 내놓고 싶다

원래 선배가 청국장 집으로 운영하던 낡고 좁은 공간이었다. “너 평소 음식 만드는 거 보면 네가 하면 ‘두레’를 잘 할 것 같다”는 말을 믿고 덜컥 시작했다. ‘내가 한 번 해볼까?’라고 생각하고 쉽게 덤볐다. 쉽지 않았다.

20대 초반부터 그리 건강한 몸은 아니었다. ‘두레’를 맡으면서 건강은 더 나빠졌다. 20년간 꾸준히 몸은 말썽을 피웠다. ‘두레’를 운영하면서 가까운 인사동 ‘혜성병원’은 단골 입원처가 되었다.

“그나마 밥 먹을 만한 집이라는 평가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유명한 분들이 많이 오셨지만 그분들도 그저 밥 한 끼 잘 먹을 수 있는 집이라고 평해주시지요.”반드시 시장에 가서 물건을 보고 고른다. 어느 지역 특산물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전국의 식재료 생산지를 쏘다녔다. 태백산맥 북쪽부터 남쪽으로 진도, 해남 땅끝마을까지. 고향인 경남 남해안 일대와 동, 서해안을 모두 다녔다.

똑같아 보이는 음식은 싫다. 아니, 한식이 아니다. 백화점 등 여덟 곳에 비빔밥 파는 ‘두레’를 열었다. ‘북촌마님’도 비빔밥을 내놓는다. 비빔밥에서 음식 맛을 똑같이 만드는 고추장은 피한다. 직접 담근 간장 등으로 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어느 지역 특산물은 믿지 않는다. 매일 시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식재료를 사들인다. 수원의 백화점에 있는 ‘두레’는 수원 지역에서 장을 본다. 가장 좋은 식재료는 시장에 있다고 믿는다. 어느 지역 음식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궁중음식, 반가음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레’는 ‘두레’다. 그저 ‘원칙을 지키는 음식’이라는 평을 듣고 싶을 뿐이다.

실제 ‘두레의 음식’은 이숙희 대표가 ‘가슴으로 만든 음식’이다.

밝은 빛으로 나왔다. 많은 일들을 했고 또 하고 있다. 소문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었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있고 또 하고 싶다. 빛의 땅으로 나온 이상 다시 어두운 소문, 그림자의 세계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인사동 '두레' 이숙희 대표

-‘두레’

- 두레 음식

‘밥 먹을 만한’ 한식 맛집들

여주 ‘두루담아’

여주 깊은 산속에 있다. 일삼아 찾아가서 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 곤지암 ‘마당넓은집’에서 운영하는 한식당이다. 음식을 보면서 “이 음식을 왜 만들었을까?”라고 되짚어 생각할 필요가 있는 밥상이다. 버섯전골과 나물이 압권이다.

순천 ‘대원식당’

절제된 남도의 밥상이다. 몇 가지 장류, 젓갈 등이 아주 맛있다. 손님 주문을 받고 즉석에서 만드는 주꾸미구이 등이 특색 있다. 날 배추를 된장에 찍어먹어도 나름의 맛을 낸다. 순천 지역의 한식노포다. 4인 이상 예약 가능.

강릉 ‘서지초가뜰’

보기 드문 ‘반가에서 차린 서민들의 밥상’이다. 농촌지역에서 일꾼들을 위해서 내온 반가의 밥상이다. 평범한 한식이 정갈하면서 수수하다. 각종 부각 종류들이 아주 좋다. 떡도 수준급이다. 강릉 반가의 음식이다.

속리산 ‘경희식당’

고 남경희 할머니가 기준을 정한 밥상이다. 반가의 귀한 밥상부터 서민의 밥상까지 모두 두루 모았다. 정과(正果)와 각종 나물 반찬, 버섯 등이 특이하다. 외꽃버섯과 정과, 봄철의 홑잎나물(화살나무 싹)도 필히 맛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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