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정정식‥‘신비한 과일가게’시리즈 작품세계

야생종딸기는 더 달고 크며 탐스러운 과일로 육성, 종(種)을 번식해 왔다. 인류도 어디선가 과거로부터 왔듯 외계서 온 풍만한 양감의 딸기가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 위를 비행하며 지구를 탐험하러 온 것일까. “…우리는 신라시대나 고대 이집트 시대 선조들과 여전히 동일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 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다. 몸과 마음은 21세기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著,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김영사>

선율이 흐르거나 유쾌한 목소리의 가벼운 질문이 지나가는 듯하다. 황홀하지만 낭만적이어서 돋보이는 사뿐히 경계를 넘어서는 움직임. 환상과 경험, 현재와 미래라는 겹 사이 불가사의한 리듬은 잠자듯 고요하네. 작품 ‘떠다니는 포도’는 드라마틱하다.

신(神)의 테이블 위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황량한 사막의 모래 같은 표면은 항성이다.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바라볼 수 있지만 모두가 나그네인 영겁의 공간으로 한갓 먼지로 사라지더라도 스스로 빛을 내는 고혹의 열망을 품은 채 쇠락의 고고한 묵언처럼 흘러내린다. 그 긴박한 심리를 일순 깨트리는 라흐마니노프(Sergey Rachmaninoff)의 로맨스(Romance Op6 No1)가 마음 깊은 곳 흐르는 감흥을 일깨우며 저녁 바람에 실려 감미롭게 흐른다. 멋쟁이 아가씨가 연두색스카프를 메고 날렵하게 거리를 지나가듯 탱글탱글한 포도송이가 공중에 떠 잠시 멈춘다.

그들은 생성과 소멸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항성의 집합체이런가. 사라져가는 존재와 아쉬운 작별을 한 듯 다시 일상을 되돌아본다. 그렇게 크던 항성이 조그마한 포도 알보다도 보잘 것 없을 수도, 늘 생활하는 실내 공간이 무한한 우주가 될 수 있다는 오묘함!

우주, 찰나와 영원 사이

‘신비한 과일가게’시리즈 태동배경이 궁금했다. 그러자 작가는 한 편의 유년기억을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저녁나절이었다. 교내의 녹조류 가득한 연못을 우연하게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물고기가 살까?’라며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았다. 물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 주위에 하루살이가 날아가는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그 순간 잔물결이 흔들리고 희미하게 색이 비치면서 생생한 금붕어 한 마리가 물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 자아를, 인간의 모습을 찾았다”라고 전했다. 물고기는 어디서부턴가 와서 연못속이 우주의 삼라만상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그런 금붕어가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엄습했다는 것이다. 그 후 세월이 지나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포도를 그리던 어느 날 옛날에 봤던 작은 연못 속 금붕어가 포도위로 오버랩 되었다고 했다. “그때 알갱이 속 미립자를 추적하다 보면 영원히 풀 수 없는 극소세계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무한한 우주의 극대세계가 동시에 겹치며 시간의 영원성, 찰나의 순환, 그 사이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염원이 얼핏 지나갔다”라고 토로했다.

정정식 작가는 홍익대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우림갤러리, 가나인사아트센터, 미국 ‘2012 Art Miami’아트페어 독립부스전 등 개인전을 12회 가졌고 스위스 ‘ART INTERNATIONAL ZURICH 2012’에서 메인화면 작가로 선정 된 바 있다. 서울 인사동서 만난 정 화백은 “그림으로 인해 화가와 관객은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기법이나 형식의 조형성을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내 그림을 보고 복잡한 생각보다는 한번쯤 빙그레 웃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덧붙였다.

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사진캡션

△(좌)떠다니는 포도, 91×116㎝ oil on canvas, 2010 △(우)해변의 딸기, 73×91㎝, 2011

△서양화가 정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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