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황인혜‥‘달빛 어린’초대전, 9월29~10월5일, 혜화아트센터

“살갗이 터지고 등이 휘어진 고목 한 그루 망망대해 육지는 아득한데 노 잃은 사공 꽃과 같이 피었던가 나비같이 날았던가 이정표도 없이 내세에는 꽃으로 태어날까 나비로 태어날까”<박경리 시 ‘내 모습’, 우리들의 시간, 나남 刊>

유년시절 졸졸 흐르는 냇물에 떠오른 둥근 보름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나 보다. 한낮 동무와 삐친 감정이 눈 녹듯 흘러들던 그 정겨운 달빛이 스쳐지나가는 밤풍경이다. 고즈넉한 초저녁 고향 한옥 문살을 톡톡 두드리며 들어온 달빛 어린 할아버지 그림자가 몹시도 그리워 훌쩍 눈물을 훔친 적도 아련하기만 하다. 홍시가 대롱달린 나뭇가지에 얹혀 밝고 그늘진 조화를 이루며 비추는 달빛을 보며 어울림을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햇빛처럼 직접 쏘아붙이지 않고 한 번 받아서 들어오니 강하지 않았다. 하여 사물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게 드러내어 치부(恥部)를 들춰내지 않고 덮어주는 아량의 그윽함을 달빛품격이라 여겼다.

작품 화면은 한지와 달빛의 부드러움이 조우한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쳐가는 달밤의 한가로운 유유자적이, 오래 전 가슴 설레던 가을편지 한 대목이 아련히 후면에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마음 속 풍경을 이뤄낸다. 무정형한 패턴 위에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며 어우러진 기하학적 문양은 마치 어머니가 만든 조각보를 떠올리게 한다.

한지로 만들어진 질감 위에 먹과 목탄의 강약 변화를 준 선(線)은 작가가 어릴 적부터 서화가이신 아버지로부터 습득하고 대학시절 국전 서예부문에 연달아 입선한 필선의 아름다움이 잘 녹아든 수려함의 본보기이다. 그래서 마티에르 질감이 완전히 매끄럽지 않고 한지의 부드러운 맛과 원료가 가지는 확 뱉어내지 않고 수용하는 그곳에 달빛이 머무는 듯하다. 약간 연한 녹색바탕이 주조를 이룬 그 역시 달빛을 받아 온 세상을 하나로 뒤덮을 수 있을 듯 교교하다. 겹겹 물감은 먼저 것이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위에서 슬쩍 덮어주어 관용의 멋스러움을 드러낸다. 어떤 면에서는 분청자기와 약간 기법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법 하다.

“한지가 주는 질감을 구겨서 붙이기도 하고 구겨진 것을 펴기도 하며 어떤 것은 물감을 들인 한지위에 붙이기도 한다. 두둘두둘한 질감위에 깊게 비치는 그런 한갓진 감흥을 일깨워 자연과 더불어 순화되는 심상의 평온함을 나타내려 했다.”

정화되는 무르익음의 숭고함

황인혜 작가는 경북여고35회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 졸업했다. 프랑스 파리한국문화원, 연세대학교100주년기념관, 독일 베를린기술박물관, 덴마크 넥서스 쿤스트센터, 뉴욕 텐리갤러리 등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한지는 유순하지만 강인한 내구성을 지녔다. 먹과 여러 혼합재료들이 어우러져 스며있는 따사로운 마음들을 한 꺼풀씩 만나며 잔잔한 흥취를 느낄 수 있기를 소망 한다”고 전했다.

지난 1971년 대구공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이번 ‘달빛 어린’초대전은 서른한 번째 개인전으로 총25여점을 선보이며 9월 29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소재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한편 화업 50여년을 반추하며 후학들에게 화가의 길에 대한 고견을 청했다. “자기 내면에서 이뤄낼 수 있는 것을 잘 나타내는 표현방법을 나름대로 갈고 닦아서 ‘최선을 다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최고다. 물론 동감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작업에 몰입할 때 세속 일을 잊어버린다는 것과 그런 과정에서 자연히 스스로 정화(淨化)되는 무르익음이 화가라는 길의 운명적 숭고함이다.”

권동철 @hankooki.com

<작품 및 인물사진 캡션>

-달빛어린-Moonlight, 90.8×60.8㎝(each) 캔버스위에 한지와 혼합재료, 2017

-가나다라-빛을 찾아, 91×65㎝, 2017

-황인혜(HWANG INHEH,黃仁惠)작가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