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옥 크레파스 작품전… 6월 25일까지 아리수 갤러리


고향 제주에 있는 돌에서 함축된 시간과 인간의 삶, 이들이 융합된 역사를 예술로 승화해온 한중옥 화백이 새롭고 더 깊어진 ‘제주의 돌’을 들고 관객과 대화한다. 서울 인사동 아리수 갤러리에서 이달 13일부터 열고 있는 개인전에서다.

한 화백에게 제주의 돌은 각별하다. 화산 활동에 의해 생겨난 섬 제주는 전체가 돌로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로 돌이 많다. 제주 사람들은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돌과 함께 삶을 영위해왔고, 생활과 무관한 돌조차 거센 바다와 바람과 부딪히며 은연중 삶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제주의 돌은 부박한 땅에 터잡은 신산한 삶을 위무하고 때로는 풍요로움을 전했다.

한 화백은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라는 독특한 환경 속에 잉태된 돌과 호흡하면서 돌이 지닌 함의들을 작품에 담았다.


“돌은 하나의 우주다. 그 다양한 표정들은 삶의 여러 모습과 닮아 있다.”

고향인 서귀포의 바닷가에서 늘 용암석을 봐온 한 화백은 돌에서 제주의 역사와 개인의 삶, 시간의 무게를 발견하고 이를 형상화했다.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수십억 년의 시간을 안고 탄생한 돌에는 세월ㆍ인고ㆍ고요ㆍ침묵ㆍ깊음 등 여러 사유의 메타포가 내밀하게 숨쉰다. 한 화백은 그 들숨과 날숨에 귀기울이며 돌에 담긴 세월, 역사, 삶의 흔적을 크레파스라는 특별한 재료로 작품화한다. 크레파스 작업은 국내외에서 드문 한 화백의 방식이다.

그는 수억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용암석처럼 크레파스로 여러 층을 두텁게 올리고, 모진 풍파에 깎이고 변화된 돌처럼 예리한 칼끝과 칼날로 긁어내고 새기고 문질러 용암 특유의 형태미와 공간적 깊이를 창출한다. 돌 자체뿐 아니라 함께한 바다와 물, 나무 등 제주의 구성체들도 그러하다.

그가 크레파스의 물성을 해석하고 소화해 일궈낸 독특하고 경이로운 조형은 크레파스라는 고정된 인식과 활용의 한계를 넘어 독창적 가치를 발현한다. 재료가 지닌 표피적 내용에서 벗어나 여타 재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표현으로 특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 화백의 작업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상철 교수(동덕여대)는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것이라는 고정 관념으로 박제돼 있던 크레파스를 현대라는 시공을 통해 해동시켜 자신이 속한 시대와 상황을 진솔하고 효과적으로 표출해 내고 있다”며 “크레파스라는 재료의 물성을 초극해 독창적인 사변의 경지로 끌어올린다”고 평했다.

칼맛으로 완성하는 그의 작품은 치밀하고 세밀한 조형성으로 실제 암석과 햇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동감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매우 추상적인 형상은 보는 이들에게 온갖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한다. 가령 돌의 특정 부분을 부각시키거나 바람결과 물결이 만들어낸 선과 형태의 변화무쌍한 작품은 구상적이며 추상적이다. 또한 디테일이 정밀해 회화와 사진의 경계가 지워진다.

한 화백의 작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다. 이는 돌에 담긴 억겁의 시간을 가늠하고 또 풍파에 씻기며 아로새겨진 시간의 표정을 읽어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칼로 제주 돌의 특유의 형태미를 창출하는 과정은 마치 구도(求道)의 길에 나서 삶을 조각해가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한 화백은 제주의 돌이 지닌 함의에 천착해온 과정을 이어가면서 한결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돌과 풍경을 보여준다.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과 한적한 바닷가의 단편, 바위를 적시며 흐르는 물 등이 그러하다. 삶 주변의 물상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갖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작가의 진정성이 더 깊어진 것이다.

또한 이전 작품보다 더 세밀하게 돌에 함축된 시간을 드러내고 세월의 두께를 형상화한 작품도 여럿 보인다. 이는 한 화백의 작품이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심안에 의한 관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도의 길에서 삶을 조각하듯 그의 치열하고 내밀한 의식이 촘촘하게 새겨진 ‘돌’은 이달 25일까지 만날 수 있다. 02)2212-5653

박종진 기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