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빌바오시는 스페인 북부의 이름 없는 작은 공업도시였다. 이곳에 1997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빌바오시는 단번에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 인구 35만 명에 불과한 도시에 연간 100만 명 관람객이 찾아오면서 일약 빌바오시는 세계적인 관광 문화도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풍요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의 품격과 시민들의 자부심이 달라졌다. 도시가 새로 탄생한 듯 살아났다. 이를 문화예술의 ‘빌바오 효과’라고 부른다. 유명한 이야기다.

요즘 ‘이건희 미술관’의 건립을 놓고 전국의 지자체가 서로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뜨겁다. 각 지역이 이런 빌바오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역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그들의 목 타는 갈망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미술관을 유치하기 위해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장점과 특징을 내세우며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과의 공·사적인 인연까지 강조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문화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그 몫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희 미술관에는 각 지역의 스토리와 함께 구겐하임처럼 ‘이건희’라는 스토리도 살아 있어야 좋다. 동시에 원칙과 논리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미술관 건립을 통해 빌바오 효과를 비롯해 얻어야 할 여러 가지 목표를 극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각 지역의 유치경쟁이 가열되자 빌바오 효과보다는 빚어질 지역 간 갈등을 더 우려해 차라리 인구가 많은 수도권에 건립할 것을 내심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대단히 얕고 짧은 생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비대화와 밀집화는 거의 재앙적 수준이다. 작금의 부동산 가격 폭등이나 소위 ‘김부선’ 철도망을 둘러싸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시민들의 아우성은 결국 수도권의 인구 과밀화에서 비롯한 문제들 아니던가.

수도권의 인구분산을 위해 행정수도를 이전하고 전국에 혁신도시를 만들었어도 되레 수도권의 인구는 분산되기는 커녕 더욱 증가해 2019년에는 전국 인구의 반 이상이 수도권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려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문화혜택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미술관은 그 작품들의 내용만으로도 세계적인 미술관이 될 것이 틀림없다. 빌바오시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연간 100만 명의 관람객이 오는데 이건희 미술관에 그 이상의 사람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니 그 이상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미술관을 이미 포화상태인 수도권에 건립한다면 사려 깊지 못한 발상이다.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보고 원칙과 논리에 입각해 적지를 정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시비를 걸거나 딴지를 걸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수도권만은 가장 최후에 검토해야 할 곳이다.

서울에서 어떤 빌바오 효과를 노리자는 것인가? 만일 그 곳이 서울의 도심지라면 그렇잖아도 혼잡한 서울의 교통문제를 얼마나 더 극심화시킬 것인가? 관람객에게 혼잡세라도 물려야 할 것인가?

이건희 미술관을 통해 무엇보다 먼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온 국민 문화 향유의 기회균등이다. 이미 문화예술 시설의 반 이상이 있는 수도권에 또다시 집중시키는 것은 공평치 못하다.

둘째는 비수도권 지역의 균형발전이다.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빌바오 효과의 극대화다. 관람객들을 통한 지역 발전을 수반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미술관 건립의 경제성과 장래 확장성이다. 미술관은 그 자체의 건축미도 예술품이어야 하고 콘텐츠 또한 유니크해서 해외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하는 걸작품이어야 한다. 관람객이 한없이 이어지는 미래적 확장성이 있게 건립해야 한다.

같은 예산이라도 부지매입보다 건축비용과 콘텐츠 개발에 더 많은 비용을 써야 한다. 그런데 부지매입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수도권 지역이라면 경제성에서 경쟁력을 잃게 된다. 수도권은 당장 인구가 많다는 장점이 있어 보이지만 그 밀집인구로 인해 원활한 교통과 접근이 지장을 받는다면 빌바오 효과나 경제성이나 확장성은 곧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명품 미술관을 만드는데 서두르지 말자. 예술품은 감가상각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지는 법이다. 이건희 미술관은 예술적 관점에서 장구한 미래를 내다보며 건립할 일이다.

지역 간의 과열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손쉽게 수도권을 선택한다면 몸에 칼 대기가 두려워 병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최민호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최민호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 프로필

최민호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해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 번이나 거쳤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 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고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30여년의 공직생활 퇴임후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다. 단순히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화(動話)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최민호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