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중시하며 즐기는 성숙된 관전법…아름다운 패자에도 환호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도쿄올림픽이 지난 8일로 막을 내렸다.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0개로 종합 16위를 기록했다. 12위를 기록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10위권 밖으로 벗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별로 아쉽지가 않다. 메달을 획득하든 그렇지 않든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린 선수는 화젯거리를 낳았고 찬사를 받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올림픽을 보는 관점도 국가 대 국가의 경쟁을 벗어나 선수 개개인의 노력과 땀 방울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메달 지상주의’ ‘맹목적 국가주의’에 매달렸던 후진적 민족주의를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시민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4등에게 더 열광하는 대중들

이번 올림픽에선 국민적 관심을 받은 ‘노메달’ 선수들이 유독 많았다. 높이뛰기 우상혁, 수영 황선우, 다이빙 우하람, 역도 김수현 선수와 여자 배구 대표팀 등 사례가 대표적이다.

우상혁 선수는 육상 높이뛰기 종목에서 2m35㎝ 높이를 넘어 귀중한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순위는 4위로 그쳐 아쉽게 메달을 놓쳤지만 그는 자기 기록에 기뻐 포효했다. 강한 인상을 받은 국민들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우상혁 선수에게 동메달 혜택을 주라”는 내용의 청원을 올렸다. 그가 역대 최고 성적을 낸 만큼 메달은 없더라도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여자 배구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세르비아에 패해 4위로 마감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 이후 45년만의 메달 도전은 결국 무산됐지만 국민들은 일본, 터키 등 한 수 앞선 전력의 강팀을 꺾고 4강 신화를 쓴 이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르비아전 경기가 끝난 뒤 주장 김연경 선수가 “우린 웃을 자격이 있다. 웃자”고 말한 뒤 선수들 모두 서로를 얼싸안으며 우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드라마틱한 감동을 남겼다. 특히 김연경 선수는 국가대표 은퇴도 선언하면서 ‘박수칠 때 떠나는 모습’을 보여줘 여운을 더했다.

금·은·동메달이 올림픽 출전의 거의 모든 목표로 인식돼왔던 한국 사회에서 이번처럼 메달권에 근접했지만 석패(惜敗)한 선수들에게 환호하는 분위기는 이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현상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선수들은 노력과 진정성을 막론하고 대중의 일차원적인 비난에 시달리는 게 당연시됐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는 메달리스트였던 이승훈 선수가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0m 경기에서 12위를 기록하자 사달이 났다. 실망한 누리꾼들이 “공항에서 계란 맞을 준비나 하라”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난 여론을 형성한 것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16강 진출에 실패한 홍명보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을 향한 이른바 ‘호박엿 테러’ 사건이 화제가 됐다. 당시 대표팀은 32강 H조에서 1무 2패로 최하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귀국 후 인천공항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일부 축구팬들은 이들을 향해 "엿 먹어라! 엿 먹어!"라고 외치며 호박엿 사탕 수십개를 던진 것이다.

승패만 따지는 ‘승자 독식주의’ 벗어나 개인 스토리 집중

한국 사회는 소수의 승자에 유독 주목하고 패자는 외면하거나 비난하는 승자 위주의 극단적인 문화가 두드러졌었다. 이런 환경에선 김연아, 장미란 등 메달리스트는 국위를 선양한 슈퍼스타로 단숨에 부상하는 반면 성과를 내지 못한 선수는 심한 경우 매국노로 몰렸다. 스포츠를 다루는 미디어 역시 이런 국민감정을 편승해 승자 위주의 콘텐츠를 생산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 도쿄올림픽에선 그런 식의 미디어 편집이 오히려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무례함을 사과해야 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은 모양새다. 한 언론은 도쿄올림픽 남자 양궁 개인전 8강에서 패한 김우진 선수에게 질책성 질문이 담긴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가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충격적인 결과다. 마지막 세트 8점은 어떻게 된 건가’라며 꼬집는 질문에 김우진 선수는 “스포츠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나 바뀌고 그래서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이다. 개인전은 아쉽지만, 그게 삶이다. 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나?”라며 의연하게 답했다. 시민들은 우문현답이라고 평가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를 연발하는 과거 모습은 사라졌다.

MBC는 마라톤 중계방송에서 해설위원이 선수를 향해 질책성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케냐 출신 귀화 마라토너인 오주한 선수가 경기 중 허벅지 통증으로 기권하자 해설위원이 “완전히 찬물을 끼얹내요. 찬물을 끼얹어”라며 실망감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해설위원의 발언은 훈련을 위해 흘린 선수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결과만 부각시켰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금메달 못 딴 중국 선수들 “매국노” 몰려 결국 눈물

한편 중국에선 금메달을 놓친 선수를 향한 대중의 도를 넘은 비난이 사회적 문제로 불거졌다. 배드민턴 남자 복식에 출전한 류이천-뤼진후이 조는 결승에서 대만에 0-2로 패하자 ‘매국노’로 몰렸다. 탁구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일본에 패한 쉬신-류스원 조 역시 은메달의 성과에도 비난에 시달렸고 결국 "정말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문가들은 스포츠를 향한 한국과 중국의 이 같은 태도 차이가 그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적 배경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국가주의가 강한 중국은 국위선양에 중점을 두고 스포츠 경기를 보는 반면 한국은 선수 개개인의 배경과 노력 등 과정에 집중한다는 얘기다.

가령 같은 4등이라도 야구 대표팀은 일부 선수들의 불성실한 태도가 논란이 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양궁의 안산 선수는 대회 성적과 함께 페미스트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당당한 젊은 여성’의 표상이 됐다. 과거 영재 발굴프로그램에서 ‘탁구 신동’으로 잘 알려진 신유빈 선수를 통해서는 슈퍼 루키의 성장기를 직관하는 대중들의 기대심리를 읽을 수도 있었다. 비록 이번에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성장이 더 기대된다는 응원이 곁들어졌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올림픽이 국가대항전의 성격을 띠면서 어느 나라가 메달을 많이 땄는지 순위를 비교하는 게 관전 포인트였다”며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국가주의를 벗어났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반드시 큰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노력을 통해 어떤 성취를 거뒀는가’를 따져보며 선수 개개인의 사연이나 가치관 등 다면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이재형 기자 silentroc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