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공업 중심의 경제도약 '용트림의 해'… '살길은 수출뿐' 산업단지 조성섬유ㆍ봉제 중심 구로공단 첫 삽… 무엇이든 판다는 '수출제일주의'월남 파병도 경제발전에 한 몫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된 초기인 1967년 구로공단의 모습(위)과 벤처기업이 들어선 지식산업센터와 아파트형 공장이 즐비한 2009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모습(아래)이 대비된다. 구로공단은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되면서 생긴 한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로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제공=한국산업단지공단
<주간한국>이 창간된 1964년은 한국 경제에 있어서 격동의 해였다. 산업화의 초기에 들어섰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아직까지 전근대적 사업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경제 발전을 독자적으로 견인해 나갈 만한 역량이 없었다. 정부의 당면 과제 역시 경제 자립을 위해 농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공업화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치유되지 않은데다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상황에서 공업화를 통한 수출산업 육성만이 경제발전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미국과 독일 등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투자 재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나갔다. 수출 경쟁력을 위해 달러당 130원이던 환율을 250원으로 2배가량 올리는 등 환율 정책을 바꾸고 수출업체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 저리 대출 등 많은 동기부여를 줬다. 기업들 역시 교육수준이 높으면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경공업 위주의 생산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수출제일주의’성과 커

이러한 ‘잘 살아보세’ 수출제일주의는 곧 성과를 보였다. 1963년에 8,680만달러였던 수출은 이 해 11월 30일에 1억달러를 넘어섰다. 이 날을 기념해 ‘수출의 날’(지금은 ‘무역의 날’)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수출진흥정책은 이후 50년이 지난 우리나라를 수출입 1조달러가 넘는 세계 8위의 무역대국,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자본이나 기술이 부족했던 당시의 수출 품목은 철광석, 주석 등 광물자원이나 값싼 합판, 의류, 가발, 농수산물 등에 머물렀다. 1970년대 들어서야 경공업 산업에서 벗어나 철강, 기계, 조선 등 중화학공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창원, 구미 등지에 중화학공업 단지를 조성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1960년대 초반 세계 수출의 0.1%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수출 비중은 1970년대 말이 돼서야 1% 수준에 다다랐다.

50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의 수출 비중은 전 세계 수출 중 2.98%로 성장했으며 수출품목 역시 ICT(정보산업기술), 중화학산업, 소재와 부품 등 전 산업에 걸쳐 최상위권의 경쟁력으로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스마트폰, 메모리반도체, LCD 디스플레이 등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고 조선 2위, 석유화학 4위, 자동차 5위, 철강 6위, 부품·소재 5위 등의 위상을 보이고 있다.

구로공단, 60년대 수출 첨병 단지로

1950년대 국내 산업 환경은 열악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약 17년간 계속된 미국의 무상원조는 광복 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 이후의 심한 식량난을 극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는 기여했지만, 대부분의 원조가 소비재 중심이었기에 자립경제를 일궈내기는 힘들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경제 체력이 약했다.

1961년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1차 산업 중심인 대한민국의 산업구조를 2차 산업 중심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 중심에 산업단지가 있었으며 1964년에 한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첫 삽이 떠졌다. 섬유와 봉제업체 등 경공업 중심 산업단지로 문을 연 구로공단은 못 먹고 부족하던 시절 경제발전의 시동을 걸며 수출 전진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구로산업단지에서 생산된 의류를 비롯해 가발, 신발, 인형 등 봉제품, 합판, 전기제품 등이 세계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대부분이 해외 기업체의 주문에 의한 OEM(주문자 상표 제품) 생산이므로 주문회사의 상표가 붙었지만, 제품의 한 귀퉁이에는 ‘메이드 인 코리아’ 태그가 붙었다.

구로공단은 이후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가발, 봉제완구 등 저임금 제조업에서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첨단산업에 이르는 한국 경제의 성장,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땀과 눈물을 오롯이 담고 있다. 처음 구로공단에 입주했던 기업의 수는 31개에 불과했으나 최근엔 1만개가 넘는 업체가 이곳에 입주해 있다. 전체 업체 수로 따져보면 50년 동안 384배나 늘어난 것이다.

고용 규모도 늘어났다. 1960년대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6,000명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16만명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처음 구로공단이 조성될 당시에 비해 근무자가 무려 80배나 늘어났다.

산업공단은 구로에 이어 구미, 창원, 여천, 반월 등지로 빠르게 넓혀갔다. 현재 국가, 일반, 도시첨단, 농공 등의 간판을 단 산업단지는 1,000개가 넘는다. 크지 않은 나라에서 이 정도 숫자면 가위 전 국토의 산업단지화라고 할 수 있다.

허약한 경제 체질에 성장의 씨

1960년대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창립하기 전이었다. 매출, 순이익, 시가총액 등에서 국내 1위인 삼성전자는 1969년 1월에 창립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67년 12월에 창립한 현대차는 이후 ‘포니정’이란 애칭으로 유명한 고(故) 정세영 회장을 거쳐 지금의 정몽구 회장에까지 이어졌다.

당시는 목재, 방직 등 주로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경공업 기업만이 경제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1964년을 기점으로 정부는 수출기업의 활동이 국가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강조하며 행정적 지원이나 자금 대출을 뒷받침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기업 설립은 활발했다. 비료나 낙농제품 회사도 있었지만 원유 정제처리, 제철, 금속공업 등 중화학공업을 모태로 하는 회사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주식시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1956년 서울 증권거래소가 개설된 지 8년이 지난 1964년까지 만해도 상장회사는 5개 시중은행을 포함해 모두 15개사에 불과했다. 거래소 개설 당시 증권업협회 추천으로 상장된 회사가 16개사였으니 그때보다도 오히려 적었다. 그나마 순수 민간기업은 경성방직과 유한양행 등 5곳밖에 안 됐고 나머지 회사들은 대부분의 주식을 정부가 보유하고 있었다. 2014년 현재 유가증권 및 코스닥 시장에 상장돼 있는 기업은 1,827개 기업에 달한다.

증권시장 거래대금 역시 주식과 채권을 다 합쳐 554억원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증권회사는 1962년 한때 60개에 달한 것이 많이 문을 닫았으나 64년까지도 여전히 35개사가 난립해 있었다. 주식시장이 그 나라 경제의 바로미터라고 하지만 그건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의 일이다. 그 시절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도 채 안 됐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이 79달러에 불과했고, 1965년에야 비로소 105달러를 기록했을 정도니 증권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기에는 기본 동력이 부족했다.

2014년 상반기 유가증권시장의 일평균 거래대금은 3조7,336억이며 코스닥 시장도 1조7,772억을 기록했다. 시가총액은 1964년 170억원에서 올해 9월 현재 1,400조원 규모로 약 8만배로 성장했다.

한편 1964년에는 한국 경제에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 1964년 베트남 파병을 결심한다. 9월 22일은 파병 선발대 140명이 사이공(호찌민)에 처음 도착한 날이다. 베트남전은 1964년부터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32만5,517명의 장병이 전쟁에 동원됐다. 5,099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부상자가 1만1,232명, 2만여 명에 이르는 고엽제 피해자가 파병의 혹독한 대가로 남았다.

하지만 이들 파병장병들의 피의 대가로 50억달러라는 자금이 유입됐다. 1963년~1964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50년간의 수출총액에 달하고 이듬해 대일 청구권 자금(약 8억달러)과 비교하면 6배가 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파병장병의 덕택에 한국 경제는 8년 6개월 동안 연평균 8% 이상 성장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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