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한푼 안 들이고 우량회사 '꿀꺽'사채업자에 예치용 자금 빌려 눈속임한 뒤 경영권 챙기고인수 대금 지급은 차일피일에스크로 제도 허점 악용해 제도 보완 요구하는 목소리

최근 한 우량기업 경영권이 기업사냥꾼들에게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규모는 작지만 건실한 기업을 '에스크로' 제도를 악용해 자금 한푼 없이 집어삼켰다. 기업사냥꾼과 바지사장, 돈줄인 사채업자가 한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벌인 결과다.

문제는 현재로선 피해자들에게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데 있다. 형사법상 마땅한 혐의가 없고, 민사를 통해 회사를 되찾더라도 빈 껍데기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사냥꾼들에게 악용된 에스크로 제도의 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꼬투리 잡아 자금 지급 거부

기업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된 회사는 종합물류업체 A사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창사 이래 25년간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건실한 기업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A사 대표 B씨는 기업사냥꾼 C씨로부터 회사 매각 요구를 받았다.

C씨는 특정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일감을 끌어올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 코스닥 상장사를 추가로 인수한 뒤 A사와 합병해 사업을 확장시키겠다는 약속도 했다. 또 직원들에게 더욱 쾌적한 근무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수개월 간 계속된 회유에 B씨는 지난달 중순 매각을 결정했다. 매각 대금은 11억1,000만원이었다. 이 회사의 실제 가격은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해 20억원 중반대로 평가된다. 이처럼 평가액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도 회사와 직원들을 생각해 매각을 결정했다.

이후 C씨는 '에스크로' 제도를 통해 법무법인에 인수 대금을 예치했다. 에스크로는 거래대금을 일시적으로 제3자에게 맡겨 놓고 물품을 받은 뒤 판매자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일종의 임차계약이다. 예치금을 확인한 B씨는 회사 경영권 일체를 C씨에게 넘겼다.

그 직후 C씨의 측근이자 바지사장격인 D씨가 대표이사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약속된 날짜에 회사를 매각한 대금은 한푼도 들어오지 않았다. D씨가 회사의 과거 자금 집행 내역 등을 문제삼으며 출금을 반대하고 나선 때문이다.

D씨는 계약서상 양자의 동의 없이는 에스크로에 예치된 대금 지급이 불가능하다는 조항을 물고 늘어졌다. 이는 계약 3일전 회사에 대한 실사를 실시한 결과였다. 이미 계약을 체결하기 전부터 대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D씨는 또 회사 직원들에게 B씨의 비리 사실에 대해 추궁하는 등 흠결 찾기에 나섰다. 특히 한 여성 경리 직원에게는 비리에 대해 밝히면 수사 대상에서 제외해 주겠다는 식의 협박을 하거나 해당 직원의 남편을 찾아가 우회적으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명동 사채 거물이 '뒷배'

이때까지만 B씨는 이들이 기업사냥꾼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의심만 했다. 그러나 이들이 사실상 인수 대금 지급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예치금의 출처가 명동 거물 사채업자인 E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C씨는 예치만을 목적으로 낮은 금리로 자금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B씨는 E씨가 기업사냥에 주도적으로 가담했을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C씨와 D씨가 10평대 월셋방을 전전하거나 부친의 집에 얹혀사는 등 담보제공능력이 전무함에도 거액을 빌려준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약은 취소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 일당이 또다른 대주주 F씨를 매수한 때문이라는 게 B씨의 주장이다. 이들은 B씨가 앞서 자신들과 계약해 추가자금을 챙겨갔고 회삿돈을 유흥에 사용했다는 등 유언비어로 E씨를 속였다고 한다.

이처럼 C씨와 D씨는 무자본으로 회사를 인수했지만 법인통장과 등기,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정상적인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보이지 않아 회사 운영에는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대신 회사 자산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선 형사법상 적용할 혐의가 마땅치 않아서다. 민사를 통해 해결하려고 해도 문제다. 민사를 통해 회사를 찾아오더라도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미 빈 껍데기만 남아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B씨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C씨와 D씨 일당이 회사를 담보로 대출을 받기 위해 관련 서류를 챙기고 있어서다. 특히 이들은 대출받은 돈으로 또다른 회사 매입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결국 제2의 피해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B씨는 "그동안 불법행위는 물론 단 한번의 세금 체납이나 직원급여 유급 없이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해 왔다"며 "한순간의 실수로 사기꾼들에 의해 회사를 빼앗기고 같이 고생하며 일하던 직원들도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탄했다.

빈번한 사례…해결책 없어

문제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데 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B씨와 유사한 피해를 입었다며 고발 내지는 투서가 접수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앞서 2011년 11월에는 에스크로 제도를 악용한 기업사냥꾼 일당이 처음으로 기소된 적도 있다.

당시 문제의 기업사냥꾼은 대리인을 내세워 코스닥 상장사 대주주에 접근해 회사 매각을 회유했다. 그리고 현금 25억원을 즉시 지급하고 주주가 보유한 주식 100만주 중 60만주를 먼저 인수하고 나머지 40만주는 에스크로 제도를 통해 법률사무소에 예치했다.

이후 잔금 24억원을 치르고 40만주를 받아가기로 했지만 해당 대주주 모르게 해당 주식을 챙겨 이를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29억원 가량을 받았다. 앞서 이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이 회사의 또다른 대주주 지분을 담보로 39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범행이 적발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넋 놓고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게 사정기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능화된 기업사냥꾼들이 이른바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변호사를 통해 법망을 빠져나갈 법적인 장치를 마련해 놓기 때문이다.

또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식하고 고발을 해도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법적 공방을 벌이는 사이 회사가 공중분해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결국 법률 비용까지 피해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기업사냥꾼들로선 최악의 경우 자신들이 내세운 바지사장만 구속되면 끝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업사냥에 악용되는 에스크로 제도의 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신뢰있는 법무법인만 에스크로건을 맡을 수 있도록 제한하는 등 제도적인 보완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송응철 기자 sec@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