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등극에 밀려난 '비운의 황태자'… 경영권 놓고 '골육상쟁'도

삼성 장남 이맹희, 부친 눈 밖에 난 뒤 외국으로 전전
현대家 정몽필, 부친 뵈러 가다 교통사고로 요절
롯데 신동주, 동생 신동빈의 치밀한 전략에 패배
한라·녹십자 장남 소송전 불사… 결국 실패로 끝나

롯데 '왕자의 난'이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한·일 롯데의 지주회사인 일본롯데홀딩스는 지난 17일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주총에서 지배구조개선 안건을 통과시키며 장남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아닌 차남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지난 14일에는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이맹희 명예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이지만 불의의 사건으로 아버지의 눈밖에 난 뒤 경영에서 멀어졌고, 사망 전 동생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상속 소송을 벌이다 패하자 야인으로 지냈다.

이렇듯 재계에선 장남으로서 후계의 유리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동생에게 권좌를 넘겨준 사례가 적지 않다. 이 과정에 형제 간 경영권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이는 경우도 심심찮다.

한때 그룹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장자상속'이라는 뿌리 깊은 전통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여러 사정으로 경영권 후계 대열에서 멀어진 '비운의 황태자'들을 살펴봤다.

삼성家 '비운의 황태자' 객사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 고(故) 이맹희 명예회장은 1960년대 '삼성가 황태자 코스'를 밟았다. 안국화재(현 삼성화재해상보험) 상무로 그룹에 발을 들인 이후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부친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 삼성그룹 부사장 직함으로 삼성호를 이끌며 차기 총수로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그룹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터진 '청와대 투서 사건'(1969년)으로 이맹희 명예회장의 황태자로서 삶은 막을 내렸다. 부친의 탈세와 비리 내용을 소상히 적은 투서가 청와대에 올라왔고, 그 투서 작성자로 이 명예회장이 지목됐다.

이 명예회장은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부친에게 불만이던 동생 고(故)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밝혔지만 당시 이병철-이맹희 부자 관계는 이 사건으로 완전히 틀어졌다. 이 명예회장은 197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동생인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 총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후 이 명예회장은 부자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삼성가 구성원들과 반목한 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골프·승마·사냥 등 취미 생활에만 심취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87년 12월 부친에 이어 그룹 회장에 취임하자 이 명예회장은 외국을 전전했고 2000년대부터는 중국 베이징 교외의 고급 빌라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삼성그룹과는 별개의 삶을 살았다.

이 명예회장은 2012년 2월 부친의 생전 차명재산 중 이건희 회장의 실명으로 전환한 주식 일부를 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세인의 눈길을 끌었다. 양측의 소송은 삼성과 CJ 간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상호 비방이 난무했다. 2년간의 소송전은 1·2심에서 패한 뒤 이 명예회장의 상고 포기로 끝났다. 재계 안팎에선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이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이 명예회장이 소송을 끝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소송 직후 이 명예회장은 폐암 악화로 인해 중국에서 방사선 치료에 전념했으나 타계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병상에 누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家 장남 왕좌 앞두고 48세 사고사

삼성과 더불어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현대가의 장남은 고(故)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이다. 고(故) 정주영 창업주의 장남으로서 이맹희 명예회장과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기 경영 수업을 받았다. 차기 총수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정몽필 전 사장은 현대양행 과장으로 그룹에 입사해 현대건설 상무·현대종합상사 부사장·인천제철 사장직을 거치며 후계 과정을 밟았다.

아버지와 장남의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다. 불같은 성격에 대범했던 정주영 창업주의 눈에는 조용한 성격의 모범생 같았던 장남이 안쓰러웠지만 속마음과 달리 엄하게 대했다.

정 전 사장은 자신을 향한 일가친족들의 기대를 부담스러워하며 종종 부친의 바람과는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우울증으로 인해 술에 의지하며 부친과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막내 숙부인 고(故) 정상영 KCC 창업주가 나서 부자의 문제를 수습했다고 한다.

정주영 창업주는 장남에게 엄격했지만 지원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측근이었던 고(故) 장우주 전 현대건설 사장에게 장남의 경영 수업을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당시 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던 현대건설의 토목사업부를 동서산업으로 분리시켜 장남에게 일임했다. 부친의 염원과는 달리 동서산업은 실적 부진으로 경영 악화를 겪었고 정 전 사장은 부친의 격로를 피해 처자식과 함께 영국에서 3년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상영 KCC 창업주의 중재로 국내에 들어온 정 전 사장은 인천제철의 사장직을 맡아 경영 정상화를 위해 울산과 인천을 매일 오갔다. 재기를 위한 움직임으로 분주하던 정 전 사장은 1982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부친을 뵈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4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정 전 사장의 빈자리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채웠다. 이후 현대가는 정주영 창업주의 후계를 놓고 정몽구-정몽헌 형제 간 '왕자의 난'이 있었고 정몽헌 회장이 대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북송금 수사 중 2003년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면서 오늘날 현대가는 정몽구 회장이 장남 역할을 하며 집안을 아우르고 있다.

롯데家 장남 쿠데타 불발, 역풍에 추락

롯데가의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최근 경영권 대결에서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회장에게 패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17일 일본에서 열린 주주총회 직후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는 형제가 사이좋게 일본은 내가, 한국은 동생(신동빈 회장)이 맡으라고 말해왔다"며 주총 결과를 수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신 전 부회장은 1990년 일본 롯데그룹의 이사직을 맡으며 후계 구도에 발을 들였다. 이후 2009년 롯데그룹의 지주회사인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직에 오르며 일본 롯데그룹의 주요 계열사 임원 및 이사직을 하나둘씩 갖춰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 신 전 부회장은 롯데 부회장·롯데 상사 부회장·롯데아이스 이사직에서 차례로 해임됐다. 이어 1월 8일에는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직에서도 해임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롯데그룹 내 주요 계열사의 임원직에서도 해임되며 롯데그룹의 경영선상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신 전 부회장은 지난 7월 94세 고령인 부친 신격호 총괄회장을 앞세워 대권 회복에 나섰다. 전세기로 일본 도쿄에 위치한 일본롯데홀딩스를 찾은 부자는 동생 신 회장을 포함한 '신동빈파' 6명의 이사를 직위에서 해임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남의 승리로 롯데 사태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차남 신동빈 회장은 5명의 일본인 이사들과 함께 절차의 부적법성을 이유로 직위에 복귀한 뒤 신격호 총괄회장을 해임시키는 초강수로 대응해 권좌를 유지했다. 그리고 17일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한·일 롯데의 명실상부한 '원리더'가 됐다.

재계에서는 신 전 부회장의 반격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 회장의 일본롯데홀딩스 및 L투자회사의 대표 취임 무효소송, 부친의 의결권을 통한 일본롯데홀딩스 경영권 회복, 주요 계열사인 롯데제과 추가 지분 확보로 신 회장 견제 등이 주요 시나리오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신 전 부회장의 반격 카드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신동빈 회장은 20일 귀국하면서 부친, 형과 대화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는 신 회장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돼 롯데가 '신동빈체제'로 굳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라ㆍ녹십자家 '비운의 황태자' 소송전 패배

현대가 계열인 한라그룹에도 '형제의 난'이 있었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첫째 동생인 정인영 한라 창업주는 장남인 정몽국 당시 한라그룹 부회장(현 엠티인더스트리 회장)을 제치고 차남인 정몽원 당시 한라그룹 부회장(현 한라그룹 회장)을 전격 그룹 총괄 경영자로 임명해 후폭풍을 몰고 왔다.

당시 정몽국 회장은 1989년 부회장에 오른 뒤 한라중공업·한라시멘트·한라레미콘 등의 그룹 주요 계열사를 지휘해 오던 터라 재계에서는 정 회장이 장자 승계원칙에 따라 경영권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1995년 3월 정인영 창업주는 정몽국 회장의 경영을 문제삼아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으로 내보내고 정몽원 회장을 총괄 경영자로 새롭게 선임했다. 정몽원 회장은 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라해운에 입사, 일찌감치 경영 수업을 쌓아오며 만도기계 차장·한라공조 대표·만도기계와 한라건설 대표이사 사장을 거치면서 1992년 그룹 부회장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보인 경영 능력이 정인영 창업주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후문이다.

형제 간 갈등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폭발했다.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이 그 해 12월 부도난 한라시멘트의 영업권을 미국계 투자회사 로스차일드로부터 4,000억원을 대출받아 되찾아 왔다. 이 과정에서 정몽원 회장은 형의 한라시멘트와 한라콘크리트 지분을 동의 없이 처분했다.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은 2003년 동생을 사문서 위조로 고소한데 이어 2005년에는 주식반환청구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동생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 엠티인더스트리 회장이 보유했던 지분은 부친인 정인영 명예회장의 명의 분산 용도였기에 정몽원 회장이 돌려줄 이유가 없다는 판결이었다. 정몽국 회장은 가계에서 완전히 손을 뗐지만 동생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故) 허영섭 녹십자그룹 창업주의 장남 허성수 전 녹십자 부사장 또한 소송전으로 일족을 적으로 만들었다. 현재 녹십자그룹은 허 전 부사장의 숙부인 허일섭 녹십자그룹 회장을 필두로 동생인 허은철 녹십자 사장,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부사장이 이끌어가고 있다.

허 전 부사장은 2009년 부친 타계 당시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허영섭 창업주의 유언장에 "장남을 유산 상속자에서 배제한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 전 부사장은 부친의 사망 직후 모친 정인애씨를 상대로 유언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해 보유 주식을 전량 처분했다.

허 전 부사장은 2010년 제기한 유류분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며 입지 변화를 겪었다. 판결 결과 지난해 8월 목암연구소·목암과학장학재단·미래나눔재단 등으로부터 그룹 지주회사인 녹십자홀딩스의 46만3,551주를 되돌려 받으며 향방을 주목케 했다.

허 전 부사장은 지난달 녹십자홀딩스 주식 2,000주를 추가 매입했다. 하지만 현재 지분율(0.97%)만으로 허 회장(10.82), 허 사장(2.36%), 허 부사장(2.44%)과 힘을 겨룰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재계에서는 허 전 부사장의 움직임에 깔린 '2차 도발' 시기를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다.



윤소영기자 ysy@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