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부총리, 이른 은행 마감시간 질타현실은 대부분 은행원 초과근무 시달려속내는 마감 시간 빌미로 노조 길들이기?관치금융 문제…일관성 있는 금융정책 필요

지난주 내내 금융권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한 마디로 술렁였다. 최 부총리는“오후 네 시에 문 닫는 은행이 어디 있느냐”며 국내 은행들의 영업 시간에 쓴소리를 가했다. 이 발언으로 이미 몇몇 은행 점포에서 실행 중인 변형시간 근로제가 대폭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 부총리의 이번 발언은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적 반응을 불러왔다. 대부분의 은행원들은 영업시간인 4시 이후에도 남은 근무를 하느라 제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 세계 각국의 은행 영업시간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최 부총리의 속내를 해석하고 있다. 낙하산 인사를 비롯한 관치금융부터 해소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영업시간을 문제 삼아 ‘노조 길들이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것이다.

부총리 한마디로 탄력근무 점포 늘어날 듯

발단은 최경환 부총리의 입에서 시작됐다. 최 부총리는 11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 참석해 “오후 4시에 문 닫는 은행이 어딨느냐”며 금융권을 질타했다. 또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도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많으니 우리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우선 최 부총리의 발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 부총리의 ‘우간다보다 못하다’라는 발언의 근거가 된 WEF의 평가가 정말로 각 나라의 금융경쟁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이 평가의 설문대상은 기업인들로 편중돼 있다.총점 중 설문조사 만족도 비중이 87.5%를 차지하며 설문 내용 또한 포괄적이다. 국가간의 금융경쟁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는 조사 방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각 나라 기업인들이 그 나라의 은행 산업에 만족하느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의 금융권 경쟁력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최 부총리가 문제 삼은 은행의 영업시간은 어떨까. 점포는 오후 4시에 문을 닫지만 대부분의 은행원들은 장시간 초과 근무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실시한 은행근로시간실태조사에 따르면 은행영업점 노동자들의 일일 총 노동시간은 평균 11시간으로 주당 15시간의 연장근로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장시간 근무는 외환위기 이후 과도하게 억제된 인력충원,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야 하는 은행권 문화, 장시간 조직 문화 등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게 노동연구원의 분석이다. 실제로 은행원들은 4시 창구업무가 끝난 후에도 그날의 실적 확인, 들어오고 나간 돈의 액수 확인 등 각종 잔업에 시달리고 있다. 금융경제연구소 임수강 연구위원은 “만약 은행 업무 시간을 늘린다면 직원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대책 없이 영업시간만 문제 삼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밝혔다.

모든 은행이 4시에 문을 닫는 것도 아니다. 은행들은 점포의 특성에 따라 이미 탄력적으로 근무시간을 운영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외국인 근로자가 많은 경기 안산 원곡동출장소와 서울 구로동지점을 포함해 17곳의 지점에서 영업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도 KB국민은행이 12곳, 신한은행이 74곳, 우리은행이 22곳의 점포에서 변형시간 근로제를 적용했다. 인천공항, 이태원 외환송금센터 등 늦은 시간에도 업무가 필요한 곳에서 이미 영업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최 부총리는 오후 네 시에 문을 닫는 은행이 전 세계에 어디 있냐고 말했지만 일본과 독일, 미국 등도 우리와 비슷한 업무 시간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부총리의 발언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영업현장에서는 볼멘소리가 높지만 은행권은 이미 네 시 이후에도 문을 여는 점포의 비율을 점차 늘려가는 것으로 방향을튼 듯하다.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은 다음달부터 이마트와 신세계 백화점 24곳에 탄력점포를 개설한다. 마트와 백화점 영업시간에 맞춰 오전 아홉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문을 열며 주말에도 영업을 한다. SC은행은 이러한 탄력점포를 내년까지 150곳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회장 또한 지난 13일 “변형 근로시간제 확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 등도 변형 근로시간제를 운영하는 점포 확대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잘못 맞춰진 금융개혁의 과녁

그렇다면 최 부총리는 왜 은행 영업시간을 언급했을까? 이에 대해선 정부가 은행권 노조를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비교적 강성노조로 분류되는 금융노조를 길들이기 위한 방편이 아니냐는 것이다.

금융노조는 지난 2009년 4월부터 폐점시간 오후 4시를 관철시켰다. 금융노조는 산별교섭이 가능한 노조인데 이는 같은 업종별로 노사가 임금과 근로 조건을 업계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강성이라 평가받는 금융 노조이기 때문에 정부가 임금피크제 등 각종 노동 개혁에 앞서 노조를 미리 길들이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국금융산업노조 김문호 위원장은 “금융권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증거로 노동자들의 업무 시간을 언급하는 건 정부에서 금융개혁의 초점을 잘못 맞춘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현재 국내 은행권의 문제는 서민들과 소상공인들에게 은행권의 문턱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민들과 소상공인들이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를 찾게 된다는 게 전반적인 은행권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일부 네티즌들은 최 부총리의 발언 후 상대적으로 고액연봉을 받는데도 오후 네 시까지 근무를 하지 않는다는 은행원들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최 부총리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은행원들의 근무 시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이끌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꾸준히 금융개혁을 주장해 왔다. 이번 최 부총리의 발언으로 금융개혁의 방향은 은행영업장으로 튀는 모양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금융권의 문제로 지나친 관치금융을 꼽고 있다. 특히 관치금융의 ‘끝판왕’인 금융권 낙하산 인사는 첫 번째 개혁 과제로 꼽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은 논하지 않은 채 노조에서만 해법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전문성이 결여된 낙하산 인사는 당연히 업계의 후퇴를 부추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정치권이나 타 산업군에서 온 낙하산 인사는 금융업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해 방만한 경영을 일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금융 정책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메카뱅크 도입, 핀테크 육성, 인터넷 전문은행 등을 강조하다가 경제부총리 말 한마디에 영업시간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몰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가 은행의 영업시간에도 칼을 대려 하면서 관치금융을 더 강화하고 있다는 부정적 견해도 나오고 있다.

애초에 개혁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금융경제연구소 임수강 연구위원은 “금융은 국민의 자산을 운영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