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부자들 대부분 자수성가…한국은 상속으로 성장
세계 400대 부자 중 자수성가형 미 71%ㆍ중 97%ㆍ일 100%
한국 0%…이건희ㆍ서경배ㆍ이재용ㆍ정몽구ㆍ최태원 모두 상속자
‘개천에서 난 용’ 명맥 끊겨 “한국 상속 자산 중요성 시작돼”

세계 400대 부자에 한국인 5명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4일 미국의 경제 전문 미디어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세계 400대 부자에 속했다.

그러나 한국인 부자 5명 모두는 자수성가형 부자가 아닌 선대로부터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금수저’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금수저’와 ‘흙수저’ 간 계급 격차가 견고해져 더는 ‘개천에서 난 용’을 배출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 우려를 표했다.

세계 1~10위 부자는 자수성가형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세계 400대 부자 중 자수성가형 부자는 259명(65%), 상속형 부자는 141명(35%)으로 집계됐다. 특히 10위권 내에 포함된 부자들 전원은 기업 창업자로 자수성가한 부자로 밝혀졌다.

세계 부자 1위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838억 달러)였다. 19살이던 1975년 미국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자본금 1500달러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그는 1990년 윈도우즈3.0을 출시하며 PC 운영체제 시장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인기 SPA 브랜드 자라의 모기업 인디텍스그룹의 아만시오 오르테가 회장(729억 달러)은 2위에 올랐다. 가난한 옷가게의 점원이었던 그는 26년간 모은 돈으로 스페인 라코루냐 지역에 자라 매장을 오픈해 현재 전 세계 패스트 패션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623억 달러)은 3위를 기록했다. 11살이던 1941년 미국 석유회사 시티서비스의 주식 3주를 주당 37달러에 구입해 40달러에 팔며 주식 투자에 뛰어든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투자자로 남았다.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회장(597억 달러)은 4위였다. ‘멕시코 통신 재벌’이자 ‘멕시코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카를로스 슬림 텔멕스텔레콤 회장은 523억 달러로 5위를 차지했다.

세계 둘째로 큰 비상장회사인 에너지기업 코크인더스트리즈의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크 형제가 각각 6위와 7위였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458억 달러)는 8위, 래리 페이지 구글 CEO는 9위,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는 10위를 기록했다.

한편 세계 400대 부자 중 아시아인은 80명(20%)으로 이 가운데 63명이 자수성가형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다수를 차지한 중국인(홍콩 제외) 부자의 경우 400위 안에 든 29명 중 28명이 자수성가형 부자였다.

중국 최고 부자는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365억 달러)이었다. 군인 출신인 왕 회장은 1988년 완다그룹을 세워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했다. 이후 리조트, 엔터테인먼트, 전자상거래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완다그룹을 100조원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297억 달러)은 세계 부자 22위였다. 중국 항저우의 영어강사였던 마 회장은 1999년 50만 위안(당시 7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알리바바를 창업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을 최대 시장으로 변모시키며 세계 쇼핑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을 얻고 있다.

홍콩 최고의 부자는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299억 달러)으로 밝혀졌다. 플라스틱 조화를 생산하는 기업에서 시작한 청쿵그룹은 1958년 부동산 개발 기업으로 변신한 뒤 호텔, 증권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리 회장을 자수성가형 세계 400대 부자 반열에 오르게 했다.

세계 400대 부자 중 일본의 경우 5명 모두 자수성가형 부자로 알려졌다. 일본 최고 부자는 SPA 브랜드 유니클로를 세운 야다이 다나시 회장(182억 달러)이었다. 이외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101억 달러), 다키자키 다케미쓰 키엔스 창업자(86억 달러), 미키타니 히로시 라쿠텐 회장(67억 달러) 등이 40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 400대 한국인 부자는 ‘대물림’

세계 400대 부자 목록에서 이건희 회장(117억 달러)이 100위권에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이 회장은 1987년 부친인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사후 계열사 주식 165억 원, 부동산 52억 원 등 총 237억 원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상속 과정은 편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이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문화재단에 기부한 지분을 되사는 방식으로 세금을 최소화했으며 8조5000억 원에 이르는 부친의 차명자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져 2008년 양도소득세 및 가산세로 1조8630억 원을 납부해야 했다.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두고 현재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 과정을 주목하고 있다. ‘국내 부자 3위’이자 세계 부자 191위인 이 부회장(66억 달러)은 2014년 5월 부친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자 삼성그룹의 경영 전면에 나섰다.

지난해 5월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선임돼 눈길을 끌었다. 이를 두고 이건희 회장이 상속받을 당시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세금을 회피했던 것과 동일한 수법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왔다.

‘국내 부자 2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79억 달러)은 세계 부자 154위에 등재됐다. 서 회장은 1997년 부친 고(故) 서성환 태평양그룹 회장으로부터 화장품 계열사인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을 상속받았다. 당시 형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이 부친으로부터 금융ㆍ건설ㆍ금속 등 주요 계열사를 상속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서경배 회장은 아모레퍼시픽을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반열에 올렸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지난해 급격한 주가 성장을 이뤘으며, 서 회장 또한 이에 탄력받아 지난해 7월 ‘대한민국 최고 부자’ 이건희 회장을 제치고 1위에 오른 바 있다.

‘국내 부자 4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47억 달러)은 세계 부자 302위였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 회장은 2000년 당시 재계 규모 1위였던 현대그룹을 두고 동생인 정몽헌 현대그룹 전 회장과 ‘왕자의 난’을 벌였다.

이듬해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그룹(차남 정몽구), 현대백화점그룹(3남 정몽근), 현대그룹(5남 정몽헌), 현대중공업그룹(6남 정몽준),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7남 정몽윤)으로 분리되며 각각 그룹의 규모와 재계 서열이 축소됐다.

‘국내 부자 5위’ 최태원 SK그룹 회장(41억 달러)은 세계 부자 374위를 기록했다. 고(故) 최종현 선경그룹(현 SK그룹) 회장이 1998년 별세한 후 SK가(家)는 가족회의를 통해 장남인 최 회장이 선친의 모든 지분을 상속하게 했다.

최태원 회장은 40억 원대의 서울 논현동 자택과 4조 원 가량의 SK그룹주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연말 불거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 여부에 따라 재산분할이 SK그룹 지분으로 진행될 경우 최 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게 재계 전문가의 전언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수저 색깔

세계 400대 한국인 부자 모두가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부를 물려받은 상속자라는 결과가 국내에 공개되자 각종 탄식과 비난이 쏟아졌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자수성가형 부자가 나오지 못하는 배경으로는 대기업 위주의 국내 경제 구조가 언급됐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미국도 포드, GE 같은 전통 대기업들이 있으나 성장세가 낮다”며 “오히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같이 창조적 아이디어로 성장한 IT기업들이 부의 원천으로 고평가를 받으며 세계 경제까지 주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미국의 부자들 경우 시장에서 받은 부는 시장으로 되돌려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며 “상속 과정에서도 세금을 떼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자손에게 부를 물려주기보다는 사회 환원을 통해 존경받는 것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의 부자들에 대해선 “스스로 쌓은 부가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식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줘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다”며 “(한국 부자들이) 부를 밖에 내놓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수성가형 부자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뻔한 결과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 경제 구조만 보더라도 대기업 위주로 짜여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회사들은 대개 중소기업이거나 대기업의 하청업체”라며 “국내 경제의 부가 대기업 위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자수성가형 부자의 등장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국내에도 IT업계 신흥 부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12월 29일 재벌닷컴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김범수 카카오 의장(1조 3907억 원)은 국내 주식 부자 15위, 이해진 네이버 의장(9895억 원)은 26위,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5479억 원)은 48위를 기록했다.

이와 관련, 정선섭 대표는 “이들이 지금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며 “카카오, 네이버, 엔씨소프트가 미국에서 탄생해 영어로 서비스했다면 벌써 세계적 기업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이고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온갖 규제를 받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국내 시장은 신생 기업에 대해 비우호적”이라며 “재벌 그룹들이 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각종 법을 만들어 규제하려하고 오너 문제, 야색(野色) 의혹 등으로 벤처 기업의 성장에 한계를 두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유행처럼 번진 수저계급론은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되는 국내 현실을 반영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의 저성장ㆍ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의 비중이 빈부 격차를 결정짓는 중요 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부의 형성에 있어서 상속 재산의 중요성은 수치를 통해 증명됐다. 지난해 11월 17일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공개한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에 따르면 한국인의 자산에서 상속 재산의 기여도는 증가 추세였다.

김낙년 교수는 개인의 자산 형성에서 상속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연평균 27.0%에서 1990년대 29.0%, 2000년대 42.0%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상속의 중요성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상속 비중은 다른 선진국보다는 아직 낮은 수준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김낙년 교수는 한국의 상속 재산의 중요도가 머잖아 선진국을 추월할 것으로 봤다. 1980~90년대 상속 재산이 개인의 자산에서 비중이 낮았던 건 당시 선진국보다 고령화가 덜 진행됐기 때문이라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낙년 교수는 “생산연령 인구가 늘고 고도성장이 이뤄졌던 80년대에는 상속 자산의 중요성이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자수성가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며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기 어렵고 변화가 이미 시작됐다”고 전했다.



윤소영 기자 ysy@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