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부채비율 낮춘 후 '지원 약속'현대엘리베이터 지원·현대증권 재매각 카드 내놓을까현 회장, 현대상선 애착 강해… 해결책 주목

1월 26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중장기 경제어젠다 추진 전략회의'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행사장으로 향하던 중 기자들의 질문세례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
현대상선의 위기가 해가 바뀐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가 해운 산업 지원책을 발표했지만 지원을 받기 위해선 부채 비율을 낮춰야 한다는 조건을 먼저 달았다. 이를 위해 발등의 불부터 먼저 꺼야 하지만 아직까지 현대그룹 측은 조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세계 해운 선사들은 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리며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다. 자칫하면 현대상선의 위기가 국내 해운산업 침체와 모회사인 현대그룹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돈다.

벌크사업부 매각 카드 내놨으나 '역부족'

정부는 지난 연말, '산업별 구조조정 추진 현황과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해운산업에 대한 지원책을 밝혔다. 우선 정부는 민관합동으로 1조4000억원 규모의 선박 펀드를 조성한다. 다만 부채 비율을 400% 이하로 낮출 경우에만 지원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 김용범 금융위 사무처장은 "정부로서는 정책금융기관의 역량을 총동원해 지원안을 마련한 것"이라며 "부채비율이 높은 해운사는 자본확충 등 자구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은 현재 시점에선 펀드 지원 신청을 할 수 없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한진해운의 부채배율은 687%, 현대상선은 무려 980%에 달한다. 양 선사 입장에선 대대적인 실적 개선이 필요한 셈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큰 규모의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해양수산부 역시 압박에 나서는 추세다.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주무 부처 입장에선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란 두 개의 국적 해운사가 경쟁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양 사의 자구 노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정리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 동안 정부를 통한 양 선사의 강제 합병설 및 현대상선 매각설이 불거질 때마다 정부 측은 합병이나 매각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부인을 해 왔다. 하지만 김 장관의 이번 발언은 종전의 입장을 뒤엎는 말로, 선사에게 강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양사 모두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현대상선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은 현금 확보 차원에서 벌크전용선 사업부를 1000억원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상선 벌크전용선 사업부는 지난해 3분기 8000억원의 매출을 올려 현대상선 전체 매출의 17%를 점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올해 4월 말과 7월 말 각각 2208억원, 2992억원의 채권 만기가 도래해 유동성을 확보해야 할 상황이다. 이 중 기한 연장이 어려워 기한 내에 반드시 갚아야 하는 '공모채'는 4월까지 1200억원, 7월 2400억원이다. 벌크 사업부 매각을 포함해 현대상선은 자구책 마련을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번 달이 끝나기 전까지 구체적인 자구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까지는 '감감무소식' 이다.

자구안 요구에 침묵 지키는 현대그룹

현대그룹은 그 동안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 왔다. 현대상선은 컨테이너 매각부터 시작해 LNG운송 부분과 현대로지스틱스 매각을 통해 1조8000억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시작된 '현대상선 살리기'의 핵심으로 꼽혔던 현대증권 매각이 물거품이 되면서 고비를 맞았다. 현대그룹은 현대증권 매각을 통해 현대상선 유동성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계 금융자본 오릭스와 협상이 결렬되면서 무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그룹이 내놓을 수 있는 자구책으로는 현대증권 재매각과 현대엘리베이터의 지원이 꼽힌다. 하지만 현대상선 지원을 통해 현대엘리베이터마저 주가하락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지원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증권 재매각 또한 현대그룹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이른바 '캐시카우'로 분류되는 현대증권 매각에 적극적이지 않고 매각을 하더라도 손에 쥘 수 있는 현금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시선이 현대그룹에 쏠린 상황에서 현정은 회장은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공식 행사에 참석한 현 회장에게 이어진 질문 세례에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몸집 늘리는 외국선사ㆍ해운 시황 침체로 '이중고'

이렇게 현대상선이 고비를 넘기고 있는 와중에도 해외 선사들은 합병을 통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선복량 기준으로 세계 3위 선사 자리에 올라 있는 프랑스의 CMA CGM이 싱가포르 선사 APL을 인수한다. 중국 국영선사인 코스코는 역시 중국 선사인 차이나 쉬핑 컨테이너 라인(CSCL)의 컨테이너 부문을 흡수 합병한다. 이로 인해 양사는 유럽, 북미 노선에서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게 됐고 동시에 영엽력을 확대하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국적 선사들은 기존에 참여하고 있던 얼라이언스에서도 도태될 수 있다. 현재 현대상선은 G6에, 한진해운은 CKYHE 얼라이언스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또한 "현재 국적선사들은 더 이상의 구조조정의 여력이 없다는 점에서 국적선사들이 자체 능력만으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갈수록 침체되는 해운 시황 또한 선사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통상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시아와 북미를 연결하는 컨테이너 노선의 경우, 중국의 춘절 연휴를 앞두면 운임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월 18일 20피트 컨테이너(TEU) 기준으로 상하이발 유럽행 운임은 지난주보다 195달러 하락한 545달러로 집계됐다. 선사들은 통상적으로 상하이발 유럽행 운임이 네 자릿수는 돼야 '본전'이라 말한다. 현재 운임은 이익을 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것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현대그룹 입장에선 현대상선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현정은 회장이 현대상선에 큰 애착을 갖고 있다. 현 회장의 부친인 고 현영원 회장은 지난 1964년 신한해운을 설립했다. 이 신한해운은 1984년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로 현대상선에 편입됐으며 현영원 회장은 편입 후에도 사돈의 배려로 회장 자리에 올라 1995년까지 현대상선 대표이사를 맡으며 오늘날의 현대상선을 만들어왔다. 즉 현재의 현대상선은 현정은 회장의 시가와 처가의 '합작품'인 것이다.

현대그룹은 지난 '형제의 난'으로 쪼개지면서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이 남아 그 위용이 과거에 비해 줄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가 긴장을 타면서 현대아산 역시 대북 사업에 차질을 겪기도 했다. 특히 최근 남북 핵실험으로 긴장 관계가 강화되면서 대북 사업은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안개정국을 달리고 있는 현대그룹이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지 주목된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