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고객' 키우는 백화점… 도 넘은 서비스로 직원들 골병

백화점 직원들이 밀려드는 손님을 맞고 있다.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2개월 된 운동화, 10년 된 침대 "교환해달라" 막무가내
대응 못해 속병 키워… 스트레스로 정신질환 앓는 직원도
지나친 고객 우선주의, 갑질 고객 만들고 직원들 병들게 해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사직서 품고 출근"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로 분류되는 백화점 직원들의 속앓이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고객의 삿대질에도 꿋꿋이 웃으며 응대해야 하는 난이도 상(上)의 서비스업 종사자다. 그런 이들을 더욱더 병들게 하는 것이'갑질 고객'들이다. 백화점 직원들을 하대하는 것은 기본이고 욕설과 우기기는 필수 옵션이다. 그러나 백화점 직원들은 고객들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참는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고객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주기도 한다. 갑질 고객들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백화점 직원들의 삶을 들여다 봤다.

백화점 눈치 보느라… 속타는 판매직원들

지난해 10월 인천 신세계백화점의 한 귀금속매장 판매직원 2명이 30대 여성 고객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국민적 비난을 샀다. 이 일은 해당 고객이 몇 년 전 구입한 액세서리를 무상수리해줄 것을 매장 직원이 거부하면서 빚어졌다. 이 고객은 직원들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1시간이 넘게 항의했고 결국 직원들은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화점 측은 손님이 갑질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매장 매니저가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자의적으로 판단해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화점의 해명을 들은 누리꾼들은 "백화점 측이 직원들을 얼마나 달달 볶았으면 직원들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 2차 갑질은 당연히 신세계백화점" "저게 직원들이 스스로 꿇은 거야? 백화점도 (직원들에게)갑질하는 거?"라고 지적했다.

누리꾼들의 이 같은 지적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많은 백화점 직원들이 백화점의 과도한 서비스 우선주의가 백화점 직원들을 병들게 한다는 데 공감했다.

인천 신세계백화점에서 여성 판매직원들이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방의 한 중소도시에 있는 A백화점에서 일하는 나모(여ㆍ24)씨는 요즘 출근하는 게 고역이다. 백화점의 '진상고객'들 때문이다. A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ㄱ'스포츠의류업체에서 판매직원으로 있는 나씨는 백화점에서 소란을 피우며 막무가내로 각종 서비스를 요구하는 고객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진상고객들을 우리는 매일 마주한다"면서 "그런 부류의 고객들은 백화점에서 생떼를 쓰면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성토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나씨가 일하는 'ㄱ'업체에서 2달 전 운동화를 구매한 40대 남성 고객이 매장으로 찾아와 환불을 요구한 것. 신발은 이미 헤질 대로 헤져 있었지만 해당 고객은 무작정 "신발에 문제가 있어 발이 아프다"고 우겼다. 나씨는 "회사('ㄱ'의류업체)방침상 신발에 결함이 있으면 본사로 보내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지만 고객은 막무가내였다. 1시간여를 타이른 끝에 고객은 돌아갔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매장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 고객의 아내였다. 나씨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욕을 그때 처음 들어봤다. 무슨무슨 년부터 시작해서 인격모독적인 말까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를 건 여성은 환불이 안 되면 교환이라도 해 놓으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씨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환불절차에 대한 설명을 수십 번 반복하고 나서야 해당 여성은 제풀에 지쳐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출근한 나씨에게 운동화 한 짝이 날아왔다. 어제 통화를 한 여성이 씩씩거리며 운동화를 던진 것이다. 해당 여성은 백화점 내 매장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다. 매니저('ㄱ'업체에 고용된 직원)가 나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ㄱ'업체가 고객에게 새 운동화로 교환해주면서 일이 무마됐다.

나씨에게 고객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준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백화점 눈치가 보이니까"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씨는 "백화점에서 시끄러운 일들이 생기면 관리자(백화점에 고용돼 입점 업체들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애를 먹는다. 소란이 심해지면 관리자 측에서 우리(입점 업체)에게 빨리 해결하라고 눈치를 준다"고 말했다. 나씨가 다니는 A백화점의 경우 고객이 컴플레인을 걸 경우 이를 모두 판매직원의 서비스가 부족한 것으로 치부한다고 했다. 고객이 매장 내에서 행패를 부리면 그들의 요구가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고객과의 마찰이 지속되면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씨는 백화점 관리자가 고객과의 잡음이 자주 있던 직원을 주시했다가 업체 본사 측에 해당 직원이 진급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관리자 눈밖에 나면 매니저까지 올라갈 수 없어 아무리 몰상식한 고객이 와도 웃으며 응대하고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려 한다"고 설명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률개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는 서비스 분야 노동조합원들.
직원 발 다쳤는데도 "구두 신어라"

경기도에 있는 B백화점 내 고급의류브랜드 'ㄴ'업체에서 일하는 이모(여ㆍ26)씨는 지난해 여름 운동 중 발목을 다쳤다. 이씨는 아픈 발보다 출근하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준(準)명품브랜드에 속하는 이씨가 일하는 매장에서는 모든 판매직원들이 구두를 신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고민 끝에 매장 매니저에게 다친 발목이 다 나을 때까지만 운동화를 신을 것을 허락 받았다. 그런데 운동화를 신은 지 이틀째 되던 날 매장을 둘러보던 한 고객으로부터 '복장 지적'을 받았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는데 왜 혼자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냐는 것이었다. 이씨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해당 고객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많이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유난이냐는 식이었다. 이씨는 "이 일을 하다 보면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해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면서 "내가 구두를 신어야 자신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건지(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국 운동화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어야 했다. 매장에 오는 손님들 모두에게 일일이 다리가 다쳤노라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점장 때문에 더 속이 상했다고 했다. 그는 "점장이 '브랜드와 백화점 이미지도 있는데'라고 하더라. 눈치를 주는 것 같아 운동화 신는 것을 포기했다"고 했다. 1~2주면 낫는다던 발목은 완치되는 데 1달이 걸렸다.

이씨는 일을 시작하고 난 뒤 건강도 나빠졌다고 했다. 신경성 위염과 장염,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다. 근무3년 차부터 이씨는 편집증과 공황장애 증세를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행여 이직할 때 문제가 생길까 싶어 정신과 치료를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는 "조금만 더 참아보다가 조금 더 편한 곳으로 옮기거나 아예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을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리자도 甲들 사이 '낀' 신세

한 광역시 소재의 C백화점 가구류 매장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는 정모씨(28)는 "C백화점의 경우 관리자들이 업체 판매직원에게 그 어떤 불이익도 줄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정씨는 백화점 고객과 판매직원 사이 각종 문제로 마찰이 발생할 경우 관리자들이 '완충지대'가 되거나 '제2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고 했다. 정씨의 말에 따르면 고객의 요구가 물건을 구입한 해당 매장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해당 층(層)의 관리자나 고객서비스실 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정씨는 "몇몇 고객들은 매장에서 환불이나 교환, 무상수리 등을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서비스센터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고 했다. 정씨는 그런 '난동고객'을 말리고 불만사항을 해결해 준다.

그에게도 기억에 남는 고객이 몇몇 있다. 지난해에는 한 고객이 백화점 측에 전화를 걸어 10년 전 구입한 침대의 교환을 요구했다. 침대를 판 가구업체가 이를 거부하자 이 고객은 백화점 측으로 타깃을 돌렸다. 정씨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고객은 들으려 하지 않고 교환해 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정씨는 그날 그 고객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그의 자식얘기, 남편얘기, 젊은 시절 얘기까지 다 들어줘야 했다. 정씨는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고객의 온갖 하소연을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면서 "이따금 어이없는 요구를 하는 고객 탓에 시간과 감정을 너무 많이 소모한다"고 토로했다.

흔들의자를 구입해 한달 간 사용한 고객이 "의자를 사용한 뒤부터 자꾸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꿈에 나온다. 아무래도 의자 때문인 것 같으니 환불해 달라"며 황당한 요구를 한 적도 있다. 정씨는 며칠간이나 시달린 끝에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객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정씨는 이따금씩 제품을 구입한 고객의 집에 직접 방문할 때도 있다고 했다. 물건에 하자가 있으니 직접 확인하고 도로 가져가라는 고객 측의 요구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구입한 본인에 의해 생긴 흠집이거나 구입 후 마음이 바뀌어 트집을 잡는 경우가 많다고 정씨는 말했다. 배송요금 없이 환불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 잘못을 떠넘긴다는 말이다. 그는 "가죽제품 가구류의 경우 사용하고 며칠만 지나도 사용의 흔적이 남아 환불이 힘든데, 2~3주 사용하고 난 뒤 꼬투리를 잡아 직원을 불러 도로 가져가게 하는 일이 많다"며 블랙컨슈머들을 겨냥해 비판했다. 정씨는 또 "고객들이 우리(백화점)를 유통업자가 아닌 제조업자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물건을 구입한 업체 측에서도 거부한 요구를 우리가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판매 직원들이 보면 우리(백화점 관리자들)가 자신들 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차피 우리도 '슈퍼갑' 손님들과 '갑' 백화점 운영진, '을' 판매 직원들 사이에 낀 '또 다른 을' 신세"라 주장했다. 정씨는 이어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출근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유니폼 안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고 하소연했다.

고객ㆍ백화점 모두 책임 커

나씨와 이씨, 정씨는 '갑질 고객'이 늘어나는 것의 원인으로 '고객들의 지나치게 대접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들었다. A백화점 판매직원 나씨는 "직장이나 가정,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자신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연 중에 백화점 직원들을 '무시해도 되는 사람' '내 밑에 있는 사람' '나에게 대우를 해줘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B백화점 판매직원 이씨도 결이 같은 얘기를 했다. 자신을 갑,을도 아닌 정(丁)이라 자조한 이씨는 "사는 게 팍팍하다 보니 입장을 바꿔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조금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앞서 언급한 신세계백화점 액세서리 매장 사례 이야기를 꺼내며 무릎을 꿇은 직원들을 십분 이해한다고도 했다. 이씨는 "내가 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오죽했으면 자존심 다 버려가며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겠는가"라고 했다. C백화점 관리자 정씨는 갑질 고객을 '또 다른 을에게 분풀이를 하는 을'로 생각한다고 말한 그는 "갑질 고객들은 자신들의 권리만 중요한 줄 알지, 우리 같은 감정노동자들의 인격이나 권리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목소리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사회가 고도화하면서 소비자 권리는 커진 데 반해 감정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억압되는 모순된 환경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나씨와 이씨, 정씨는 '백화점의 지나친 서비스 정신'도 지적했다. 손님을 왕처럼 떠받드는 백화점 운영 방식이 감정노동자들의 속병을 키울 뿐만 아니라 고객들이 더욱더 터무니없는 요구를 당당히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백화점이 서비스로 먹고 산다는 것을 악용하는 손님들이 너무나 많다고 주장했다. 나씨는 "백화점은 고객이 최상의 환경에서 쇼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난동을 부리는 고객이 있으면 어떻게는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해주려 한다"며 "이를 손님들이 잘 알기 때문에 무조건 소리지르고 떼부터 쓰는 손님들이 계속 나오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정씨도 동조했다. 그는 백화점 업계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경쟁업체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웬만한 요구는 눈감고 들어주는 형편이라고 했다. 물론 이런 운영방침에 가장 힘이 드는 건 현장에서 고객과 직접 맞닥뜨리는 직원들이다. 정씨는 "우리 같이 감정 소모가 심한 직업군(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현실적인 보호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백화점의 서비스 방침에 어느 정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오보람 인턴기자 boram3428 @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