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회적 책무 이행 긍정 평가… 승계 위한 '편법 도구' 지적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메르스 사태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 삼성생명 공익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언론 앞에 섰다.
삼성, 여러 재단 통해 다양한 사회 환원… 이재용 승계 관련설 제기돼
현대차·LG·SK·롯데·CJ 등 재계 대부분 그룹 봉사·문화 재단 운영
주요 계열사 지분 보유로 향후 승계시 '조커 역할'… '편법 상속' 비난

지난해 메르스 파동으로 공식 사과에 나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전자 부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이라는 직함으로 언론 앞에 섰다.

이 부회장을 포함해 국내 대기업 오너들은 기업 총수뿐만 아니라 '공익재단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대기업은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적 책무를 이행한다. 의료 사업, 저소득층 교육 지원부터 총수의 관심도가 높은 문화 영역의 유망주 발굴까지 사업 분야는 다양하다.

설립 취지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익재단은 재벌의 편법적 승계 도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그룹의 지주회사에 해당하는 핵심 계열사의 지분을 다수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 세제 혜택까지 줌으로써 세금을 내지 않고 주식을 증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삼구의 '클래식', 조양호의 '사진'… 공익재단 통해 키워

세계 최대규모인 미국 휠체어 자선단체 후원을 통해 국내 장애우에게 후원금을 전달한 정몽구 회장(왼쪽)이 감사 기증서를 전달받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공익재단 운영을 통해 문화, 복지, 교육 등 다양한 사회 환원에 나서고 있다.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은 삼성생명공익재단,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호암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의 경우 삼성미술관 리움, 플라토, 호암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삼성서울병원을 운영 중이다. 이건희 회장의 사재출연으로 설립된 삼성복지재단은 전국 23개 도시에서 31개소의 삼성어린이집을 건립해 운영 중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의 사재 출연으로 설립한 '정몽구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정몽구재단은 문화예술, 인재양성, 의료지원, 사회복지 관련 사업을 펼치고 있다.

LG 또한 다수의 공익재단을 운영 중이다. LG연암문화재단의 경우 LG아트센터를 운영하며 문화, 학술, 장학 사업을 펼친다. 이 밖에도 LG복지재단, LG상록재단, LG연암학원을 통해 사회복지, 자연환경, 교육 분야에서 공익 사업을 벌인다.

SK는 최태원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는 금호아시아나재단을 통해 음악계, 그 중에서도 클래식 꿈나무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롯데는 롯데장학재단, 롯데복지재단, 롯데삼동복지재단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9월엔 신동빈 회장의 사재 100억원 출연으로 롯데문화재단도 설립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문화재단을 통해 클래식 유망주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진은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왼쪽)과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설립한 아산나눔재단은 현재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이사장으로 있으며 현대아산병원을 운영 중이다. CJ는 CJ문화재단과 CJ나눔재단을 통해 문화 창작과 취약계층 아동의 교육 등을 지원한다. 한진그룹은 양현재단, 일우재단, 정석물류학술재단을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의 공익재단 운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외국 거부들의 경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위해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환원에 앞장선다. 우리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 갖는 사회적 책무를 공익재단이 운영하는 사업을 통해 이행한다.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대기업 회장들은 사재를 공익재단에 기탁하기도 한다. 롯데그룹의 경우 지난해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자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신동빈 회장의 사재 출연을 바탕으로 롯데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창업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재단도 있다. 호암재단과 아산나눔재단은 호암 이병철, 아산 정주영 등 1세대 창업자들의 이념과 사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됐다.

각 대기업의 주력 사업 부문에서 사회적 책무를 이어가기도 한다. 국내 문화 콘텐츠를 이끌고 있는 CJ는 젊은 문화인들의 창작을 지원한다. 해운, 항공 등 물류를 주력 사업으로 삼는 한진은 해운 물류과 관련된 학술 및 연구 활동 지원과 해운사업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나선다.

'회장님'의 관심 분야가 공익 사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회장은 소문난 클래식 애호가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피아니스트 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이 데뷔했으며 국내 클래식 유망주들에게 악기 대여 사업 등을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직접 찍은 사진들을 모아 사진집을 낼 만큼 사진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 한진그룹 산하 일우재단은 '일우사진상'을 통해 역량 있는 사진작가들을 발굴하고 있다.

삼성공익재단, 이재용 승계 활용설

규모 있는 대기업의 공익 사업은 그 자체로만 보자면 박수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익재단이 상속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비난도 받고 있다.

최근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삼성SDI 지분 인수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았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통합 삼성물산 출범 이후 공정거래위원회에게 강화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를 위해 삼성SDI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취득하게 된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를 매각했다. 그런데 이 중 200만주는 삼성생명공익재단에 매각하고, 130만5000주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매각했다.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는 이에 대해 "매각 결과 삼성SDI의 삼성물산 지분은 4.73%에서 2.09%로 줄어들었지만 이 부회장의 지분은 16.4%에서 17.22%로 늘었다"고 지적했다. 또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새로 1.05%지분을 취득함으로써, 삼성문화재단과 삼성복지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등 계열 공익법인들의 지분이 0.65%에서 1.70%로 늘었다.

삼성 측은 순환출자 해소 과정에서 대규모 주식매각에 따른 시장 부담 최소화 및 소액주주 피해 방지 차원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주식을 매입하고, 보유 현금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수익 확보 차원에서 삼성생명공익재단 역시 주식을 매입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경제개혁연대는 논평을 통해 "공익법인이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삼성물산의 주식을 취득하는 것은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권 승계를 위한 또 다른 '편법'이라는 비난을 자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번에 삼성물산 지분을 인수한 자금의 원천이 '차명주식'임이 거의 확실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참여연대 또한 "삼성재단의 이번 삼성물산 주식취득이 단순히 삼성생명 주식 출연의 석연치 않은 경과나 삼성재단을 부당한 목적에 활용하지 않겠다는 이재용 이사장의 약속파기 등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뿐 아니라, 공익법인의 재산을 사적 용도에 사용하여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참여연대 김은정 간사는 "이번 삼성의 행태는 공익법인의 경우 출연재산 매각대금은 3년 이내에 공익목적사업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48조 제2항 제4호'를 위반한 것이라 판단해 증여세와 가산세를 부과할 것을 촉구한 것"이라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건희 회장의 직함을 물려받은 것이다. 삼성그룹의 공익 재단 이사장직을 맡으며 삼성 후계자로서의 상징적 의미도 챙기게 됐다. 지난해에는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으로써 삼성서울병원 발 메르스 사태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이사장직 취임을 둘러싸고 당시에도 3세대 경영권 세습을 위해 공익재단이 이용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돌기도 했다.

핵심 지주사 지분 다수 보유한 공익재단

이러한 우려의 원인은 상당수의 대기업 공익재단이 기업의 주요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통합 삼성물산 지분의 경우 삼성복지재단이 0.04%, 삼성문화재단이 0.06%, 삼성생명공익재단이 1.05%를 보유하고 있다. 공익재단의 지분을 합치면 1.15%이다. 삼성생명의 경우도 삼성문화재단이 4.68%, 삼성공익재단이 2.18%를 갖고 있다. 삼성의 금융 계열사가 삼성생명을 지주회사 삼아 지배 구조를 정리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힘을 얻고 있는 시점에서, 향후 공익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의 지분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비단 삼성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5월,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내 30대 그룹 공익재단의 계열사 주식 보유 현황을 조사한 결과, 22개 그룹의 35개 공익재단이 118개사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의 정몽구재단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4.46%, 이노션 지분 10%를 보유하고 있다. LG그룹의 경우 LG연암문화재단이 0.33%의 지분을 갖고 있고 LG연암학원이 2.13%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이와 관련된 지적이 있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박영선 의원은 지난해 9월 기획재정부 국장감사에서 "대기업 계열 공익법인들이 계열사 주식을 대거 보유하는 방법으로 증여세 등 세금을 회피해 사실상 상속증여의 수단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이 국세청으로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꿈장학재단,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등이 삼성생명과 삼성SDS, 삼성전자, 삼성증권,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 계열사 주식을 장부가기준 4093억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시가로(지난해 7월 31일 종가) 5조 4402억원어치다. 이애 대해 박 의원은 "상속증여세 세율이 최고 50%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회장이 상속증여세를 한푼 납부하지 않고 5조 4402억원의 계열사 지분을 실질적으로 확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현대차그룹에 대해서도 정몽구 회장이 2006년 현대글로비스 비자금사태 직후 1조원 사재 출연을 약속한 뒤 현재까지 보유주식 8500억원 어치를 출연했지만 이중 5871억원 어치는 현대차 정몽구재단이 보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익법인과 관련해 소송이 진행중인 곳도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을 비롯한 이사진을 배임혐의로 고발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1월 29일,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및 학교법인 죽호학원이 당초 설립 취지나 사업 목적과는 달리 박삼구 회장 개인의 그룹 지배권 확보를 위해 법인 재산의 손실을 감수하며 금호기업에 출자한 것으로 판단해 박삼구 회장을 비롯한 이사 19명을 특경가법 위반(업무상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금호산업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 인수, 대한통인 인수를 거치며 차입금 규모가 커져 2008년 이후 그룹 전체로 유동성 위기가 확산돼 2010년 워크아웃 절차를 밟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박삼구 회장은 지분율이 축소돼 지배권을 잃었으나 지난해 12월 인수대금을 모두 완납해 금호산업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박 회장은 금호산업의 인수 지배를 위해 금호기업을 설립했는데 여기에 금호재단과 죽호학원이 각각 400억원, 150억원을 출자해 비판을 받았다. 서울중앙지검은 1심에서 불기소처분을 내렸는데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항고장을 제출한 상태다.

공익재단 증여 도구 악용 막아야

공익재단이 증여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현행 상속증여세법 48조에 따른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공익법인 등이 출연 받은 재산의 가액은 증여세 과세 가액에 산입하지 아니한다'고 돼 있다. 상속증여세법 48조는 또 공익법인이 상속증여세 혜택을 받기 위해선 내국법인의 의결권 주식 5% 이상을 보유해선 안되지만 성실공익법인으로 지정된 경우 10%까지 확대 가능하다고 함으로써 대기업 입장에선 유리하게 공익법인을 상속에 이용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놨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러한 성실공익법인 폐지에 대해 지난해 10월, 박영선 의원을 대표로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현행법은 성실공익법인으로 하여금 공익사업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익사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계열회사 주식을 더 많이 보유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공익법인제도를 재벌의 편법 상속·증여 및 계열회사 지배강화 수단으로 악용되도록 하고 있는 상황이며 본래의 공익법인제도 취지와 달리 운용되고 있는 성실공익법인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공익법인을 활용한 부당한 상속·증여를 막고 조세형평성을 제고하려는 것이라 지적했다. 이 안건은 현재 축조심사 중이다.

전문가들은 공익법인이 증여의 도구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전성인 교수는 "공익재단을 통한 편법증여의 핵심은 지배력을 증여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선 공익재단이 기증 방식으로 계열사 지분을 받을 순 있지만 구입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열사의 지분을 갖는 것이 공익재단의 사업과는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또 "만약 공익재단이 계열사의 주식을 받을 때, 지분을 바탕으로 경영권을 행사하려면 증여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