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ㆍ3세 경영 이어 4세대 일반화… 경영권ㆍ상속 분쟁 계열분리로

최근 현대자동차는 현대상선 인수설에 대해 부인했다.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왼쪽)과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사진=연합
삼성, 신세계ㆍCJ와 '크고 작은 갈등'
현대차, 현대상선 인수 제안 '거절'
4세대 대기업, '계열분리'는 선택 아닌 필수?
재벌 힘 분산 위해선 계열분리 긍정적

국내 대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자가 곧 경영에 참가한다. 창업주 한 명의 손에서 탄생한 기업이 자녀, 손자대로 이어질수록 경영권을 나눠줘야 할 사람은 늘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유산 분쟁이나 경영권 다툼이 생기면, 계열분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범삼성가'로 통칭되는 CJ, 신세계, 한솔은 모두 삼성그룹이라는 모체 안에서 탄생했다. 현대자동차와 현대그룹, 현대중공업 역시 뿌리를 같이한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삼남매가 활발하게 경영에 참가하면서 계열분리 가능성이 예측되고 있다. 다른 대기업들 또한 경영에 참가하는 자녀가 많아질수록 계열분리는 피할 수 없게 된다. 각자 사업 부문을 하나씩 물려받아 본가를 떠나는 3ㆍ4세대가 흔해질 것으로 보인다.

범 삼성가 싸움에 소비자 등만 터진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최근 유통업계에선 범삼성가의 '페이 전쟁'이 눈길을 끌었다. 삼성그룹의 계열신라인 호텔신라와 에버랜드에서 신세계 상품권 이용이 전면 차단된 것이다.

이는 모바일 간편 결제 서비스에서 촉발됐다. 신세계는 신세계백화점, 스타벅스, 이마트 등 자체 유통 채널에서 '삼성페이'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현대백화점, 롯데 등 국내 다른 유통 기업들이 삼성페이를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세계는 SSG 페이라는 자체적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갤럭시 시리즈를 바탕으로 점유율을 넓히고 있는 삼성페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세계가 자체 유통 채널에서 삼성페이 사용을 금지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현대백화점과 롯데 또한 'H월렛'과 'L페이'라는 자체 모바일 간편 결제 서비스를 내놨기 때문에 이번 '페이 전쟁'의 원인은 범삼성가 간 갈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삼성, 신세계, CJ, 한솔그룹은 모두 '범삼성가'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명예회장의 자녀들이 각각 계열분리를 통해 설립한 회사이다. 지금이야 계열분리를 통해 각자 재계를 주름잡는 회사로 성장했지만 이들의 갈등은 이병철 명예회장 작고 후 유산 상속 소송부터 시작됐다.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유산 상속 소송에서 신세계 이명희 회장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 입장을 지킨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상 이맹희 회장 편에 선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이건희 회장을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 때부터 삼성과 신세계간의 갈등이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소송에서 중립을 택한 신세계도 갈등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인 CJ와 삼성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진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두 그룹은 지난 2011년 대한통운 인수를 두고 물류 영역에서 부딪히기도 했다. 이듬해 이맹희 명예회장이 제기한 유산상속 소송으로 그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두 그룹의 갈등은 지난해 이맹희 명예회장의 작고 후 삼성가 식구들이 조문을 하며 겉으로는 봉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사업 영역이 겹친다면 언제든지 또 등을 돌릴 수 있다. 신세계와 삼성은 서울 시내 면세점 입찰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인 바 있다. 결과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즉 삼성의 승리였다. 이번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를 둘러싼 갈등 또한 대기업들이 모바일 간편결제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싸움에서 애꿎은 소비자들만 불편을 겪게 됐다.

한진그룹 품에 안긴 한진해운, 현대상선의 운명은

한 배에서 나왔지만 재산상속, 사업 영역 충돌 등 계열분리 후에도 재벌가는 끊임없는 갈등을 겪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체가 같다는 이유로 계열분리 후에도 특정 계열사 인수를 요구받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양대 국적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현대상선의 1순위 인수 후보로 현대자동차가 꼽힌 것이다. 현대자동차 측은 현대상선 인수 가능성에 대해 딱 잘라 거절한 상태다. 그러나 현대그룹이라는 같은 틀 안에서 나왔고, 현대자동차가 계열사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자동차 운반선 사업에 나선다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돼왔다. 하지만 이미 '왕자의 난' 이후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계열 분리해 나감으로써 사실상 다른 그룹이 된지 오래고, 현재 컨테이너선 시황이 좋지 않아 수익을 낼 수 없다는 점에서 현대상선 인수는 전혀 매력적인 카드가 아니었다.

현대그룹은 과거 계열분리를 통해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독립시켰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던 자동차와 중공업을 내보냄으로써 현대의 명성은 예전과 같지 않다. 특히 그룹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부진과 남북관계 경직으로 경협 사업 또한 중단되면서 큰 위기를 겪고 있다.

한진해운의 경우, 경영난 악화로 인해 계열분리를 접고 다시 한진그룹의 품에 안겼다. 조양호 회장의 동생인 고 조수호 회장은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별세 후 계열분리를 통해 한진해운을 들고 나왔다. 조수호 회장 타계 후 아내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경영해왔으나 지난 2014년 해운시황 침체로 인한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시숙에게 돌려주게 됐다. 한진그룹의 경우,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을 물려받고 조남호 회장이 한진중공업, 막내인 조정호 회장이 메리츠금융을 물려받아 각각 계열분리를 통해 독자적 사업 구도를 구축하고 있다.

형제 간 경영권 분쟁 계열분리 가속화

과거 계열분리는 '형제의 난'을 통해 주로 이뤄졌다. 1세대 창업주에게 선택받지 못한 다른 아들들이 계열사를 들고 나오면서 시작됐다. 삼성, 현대, 한진이 대표적 사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자산을 기준으로 매긴 2016년 순위에서 상위 20곳에 든 대기업의 대다수가 계열분리를 통해 탄생했다. 삼성-신세계-CJ가 '범 삼성가',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이 '범 현대가', LG-GS-LS도 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다.

1세대에서 2세대로, 다시 3세대까지 이어진 대기업 경영 승계에서 이젠 4세대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분을 나눠줘야 할 친인척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계열분리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특히 4세대까지 경영권 세습이 진행되면서 형제간에도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이뤄지는데 형제보다 유대력이 약한 사촌들의 경우 처음부터 독립적인 계열분리를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계열분리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계열분리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들 수 있다. 한 때는 형제 경영의 모범 케이스라 여겨지기도 했지만 대한통운과 대우건설 매각으로 골이 깊어진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계열분리를 통해 서로 다른 기업집단을 이끈다는 것을 인정받게 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금호석유화학 8개 계열사들이 법적으로 서로 다른 회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2010년부터 금호석화 등 8개사는 신입사원을 별도로 채용하는 점, '금호'라는 상호는 쓰지만 금호아시아나의 로고는 쓰고 있지 않은 점, 사옥을 분리해 사용하고 있는 점, 기업집단현황을 별도로 공시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경영을 분리해 운영하고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효성 또한 계열분리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효성의 계열분리 역시 2세대부터 이뤄졌는데 조석래 회장이 모체인 효성그룹을 맡고 두 동생인 조양래 회장이 한국타이어, 조욱래 회장이 대전피혁을 들고 나왔다. 조석래 회장의 삼형제인 조현준 효성 사장,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 조현상 효성 부사장 또한 계열분리를 통해 각자 갈 길을 구축할 판이다. 특히 아버지와 형, 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낸 조현문 전 부사장의 경우 동륭실업 계열분리를 통해 효성에서 독립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재계 3, 4대 경영시대 열리며 계열분리 활발

계열분리가 이뤄지려면 기업 경영에 참가하는 자녀가 두 명 이상이어야 한다. 지난해부터 경영권 분쟁을 겪어온 롯데는 신동주ㆍ동빈 형제의 한-일 롯데 분리 경영설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으나 차남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 분쟁의 승자가 되면서 그러한 가능성은 사라지게 됐다. SK와 CJ의 경우 3세대들이 젊어 경영권 승계를 논하기엔 이른 상황이다.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장남이 태양광, 차남이 금융, 삼남이 건설 쪽 계열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지만 김 회장이 건재해 후계구도를 논할 단계는 아니다. 현대차의 경우 외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이 누나들에 비해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삼성은 세 자녀가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영향력 또한 적지 않아 계열 분리설이 주기적으로 큰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재벌의 계열분리는 3대, 4대를 걸쳐 경영권이 내려올수록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들은 재벌의 강화된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계열분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지난 18대 대선부터 '대기업 계열분리 명령제'를 주장해 왔다. 계열분리명령제란 대기업의 계열사로부터 시장 지배력 남용과 독점 폐해가 발생하면 해당 기업의 지분매각을 명령해 대기업 집단에서 분리해 내는 제도이다. 안 의원은 이를 다듬어 지난 2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의 골자는 공정위가 독과점적 시장구조가 장기간 유지되는 경우, 주식 처분, 영업 양도 등 기업분할 및 계열분리를 위한 구조적인 조치를 명하는 내용의 소를 법원에 제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대기업 집단의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고, 19대 국회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통과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재벌 총수 입장에선 집중된 힘과 계열사 간의 시너지를 위해 형제, 사촌들의 계열분리가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경영에 참가하는 가족들이 늘어날수록 계열분리는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다. 특히 현대, 롯데, 효성 등 '형제의 난'이 일어난 기업들처럼 경영권 분쟁을 위해 혈육간 소송전까지 불사하는 경우, 계열 분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전망이다.

■ 삼성 3남매 계열분리 어떻게 되나

이부진, 지분 맞바꾸고 호텔신라 들고 나올까

대기업의 계열 분리 가능성에서 가장 주목 받는 곳은 삼성그룹이다. 이미 이건희 회장의 세 자녀가 각자 독립된 사업 영역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전자 및 금융,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유통 및 화학, 차녀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이 패션과 광고를 맡는 것이 통상적인 후계 구도였다.

그런데 최근 이 구도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이부진 사장의 몫으로 거론됐던 삼성그룹의 화학 및 방산 계열사가 잇따른 '빅딜'을 통해 롯데와 한화로 가게 된 것이다. 이서현 사장의 남편인 김재열씨가 사장으로 올라 있는 제일기획 또한 유럽 광고 회사로 매각설이 불거진 상황이다. 게다가 제일모직의 경우 지난해 통합 삼성물산 출범으로 삼성물산 품에 안긴 모양새가 돼 버렸다. 이에 따라 자매는 향후 유통과 패션이라는 예상보다 축소된 규모로 사업 영역을 물려받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삼성그룹은 심심하면 불거지는 계열분리 가능성에 대해선 내내 부인해왔다. 하지만 향후 이부진ㆍ서현 자매가 독립된 사업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호텔과 패션 사업을 안고 삼성에서 나올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는 '지분'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한다.

과거 제일제당이 삼성에서 분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맹희 명예회장의 아내 손복남 고문이 보유하고 있었던 옛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지분을 제일제당의 지분과 맞바꾸면서 가능했다. 이재용 부회장 또한 후계 구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자매가 보유한 계열사의 지분을 맞바꾸는 형식을 통해 딸들의 계열분리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통합 삼성물산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17.23%로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이부진ㆍ서현 사장의 경우 각각 5.51%의 지분을 갖고 있다. 만약 계열분리를 추진한다면 이부진 사장의 경우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은 호텔신라의 지분과 기타 계열사의 지분을 교환할 가능성이 커졌다. 반면 이서현 사장은 조금 입장이 다르다. 패션 부문이 통합 삼성물산 안에 들어간 지금, 계열분리의 초석이 될 수 있는 지분 또한 모자랄 뿐만이 아니라 사업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통합 삼성물산 출범으로 예전보다 강해진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 역시 계열분리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