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못잖은 활약… 관건은 경영능력

고학력ㆍ사회 경험 통해 아들 못지 않은 스펙 쌓아

결혼 후에도 친정 남아 활발한 행보

남자 형제들보다 엄격한 기준 요구받기도

창업주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시기만 해도 재벌가의 딸들은 ‘출가외인’이라는 명분 하에 대부분 기업 경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재계 3ㆍ4세대 딸들의 활약도 두드러지고 있다. 아들 못지 않은 고학력과 활발한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딸들 역시 기업 승계에 ‘조커’로 부상한 것이다.

오너가 아들들처럼 딸들 역시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주요직을 꿰차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금수저라는 편견과 아들들보다 더 나은 경영 성과를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은 여전히 딸들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화여대에서 해외 명문대로 바뀐 딸들의 학력

지난 3월 열린 주주총회에선 여러 명의 재계 3ㆍ4세들이 경영 일선에 등장했다. 이 중 등기이사 등록과 지분 상속을 통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회장님의 따님’들이 눈에 띄었다.

화장품 기업 토니모리는 배해동 회장의 장녀 배진형씨를 신규 사내이사에 선임했다. 1990년생인 배진형씨는 뉴욕대를 졸업했으며 지난 2015년 토니모리 해외사업부에 입사해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토니모리 주식은 8.50% 보유하고 있다. 20대의 짧은 경력을 가진 배진형씨가 사내이사에 선임되자 ‘금수저’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이에 대해 배해동 회장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책임 경영을 위한 것”이라 선을 그었다.

부산 향토기업인 조광페인트는 지난달 22일, 최대 주주를 고 양성민 회장에서 셋째 딸 양성아씨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1977년생인 양성아씨는 양 회장의 지분 12.22%를 전부 물려받아 총 17.84%를 보유해 최대 주주에 등극했다. 이로써 조광페인트는 3세 경영 체제에 접어들었다. 양성민 회장의 별세로 조광페인트는 양 회장의 부인인 송경자씨를 회장으로 선임하고 전문 경영인을 임용할 것이라 밝혔다.

딸이 이미 경영권 승계를 완료한 기업도 있다. 전남에 기반을 둔 주류기업 보해양조는 지난해 11월 1985년생인 임지선 대표이사를 회사 경영 업무를 총괄하는 부사장으로 선임했다. 임 부사장은 창업주인 고 임광행 회장의 손녀로 임 회장의 차남인 임성우 ㈜창해에탄올 회장의 1남 2녀 중 장녀다.

명문 해외대를 졸업하고 관련 분야에서 아들들 못지 않은 경력을 쌓은 ‘회장님의 딸들’이 향후 기업을 이끌 축으로 성장하고 있다. 30대 딸들 중에선 대상그룹 임상민 상무(1980년생),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1983년생), 금호석유화학 박주형 상무(1980년생), 조연주 한솔케미칼 부사장(1979년생)이 눈에 띈다. 임상민 상무는 언니인 임세령 상무보다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조현민 전무는 30대 대기업 중 최연소 임원에 올라 있다. 박주형 상무는 최근 금호석유화학 주식을 잇따라 매입하며 경영권 승계를 준비 중이다. 조연주 부사장은 범삼성가 4세 중 가장 먼저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장녀인 박하민씨는 20대 기업가 자녀들 중 단연 주목받고 있다. 1989년생인 박하민씨는 미국 코넬데를 졸업했고 메켄지코리아 등 외국계 회사 근무 이력을 갖고 있다. 미래에셋운용 홍콩법인 해외부동산투자본부에 입사했다. 박하민씨는 미래에셋컨설팅 주식을 8.19% 보유하고 있는데 박 회장이 공공연하게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계획이 없다”라고 밝혀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의 장녀 서민정씨는 ‘20대 주식 부호 1위’로 눈길을 끌었다. 현재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에 재직중으로 알려진 서민정씨는 1991년생으로 아모레퍼시픽그룹 지분 26.48%를 보유하고 있다. 향후 서민정씨가 아모레퍼시픽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서민정씨처럼 향후 그룹 경영에 참가할 것으로 기대되는 3ㆍ4세 딸들로는 SK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씨(1989년생),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장녀 이경후 CJ오쇼핑 과장(1985년생)이 있다.

유리 천장을 깬 금수저 딸들

삼성 이병철 창업주는 3남5녀를 뒀다. 이 중 세 아들은 모두 경영권 승계 과정에 참여했으며 다섯 명의 딸 중 두 명이 계열분리를 통해 독립했고 세 명은 경영과는 거리를 뒀다. 현대 정주영 창업주는 8남1녀를 뒀는데 아들들만이 경영에 참가했다. 특히 현대가는 여자의 사회 활동에 보수적이었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나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의 경우, 가정주부로 살다가 남편의 사후 경영에 참가했다. 과거 재벌가 딸들은 결혼과 동시에 상속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내조에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2세대 회장님들은 적게는 2명, 많게는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형제가 많지 않아 경영권 경쟁자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는 것 또한 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출가외인’이라는 명분 아래 친정의 경영권과는 멀어졌던 과거완 달리 오히려 결혼 후 딸과 함께 사위들이 처가로 편입돼 능력을 펼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 딸들 역시 아들들 못지 않은 고학력을 갖췄다. 아모레퍼시픽 서민정, 미래에셋 박하민씨는 코넬대를 졸업했고 SK 최윤정씨는 시카고대를 나왔다. 2세대 재벌가 여성들 중 활발히 경영에 참여한 삼성가 딸들의 경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이화여대 가정과 중퇴,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를 졸업했다. 국내 명문 여대에서 해외 대학으로 딸들의 학력 판도가 바뀌고 있다. 또 해외 계열사나 컨설팅 회사 등에서 사회 경험을 쌓는 경우도 많아졌다. 특히 베인앤컴퍼니는 SK 최윤정, 아모레퍼시픽 서민정, LG 구민정 등 다수의 재벌가 딸들이 거쳐간 컨설팅회사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룹의 뼈대를 이어갈 만한 주력 계열사를 맡은 딸들은 보이지 않는다. 삼성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핵심 계열사인 전자와 금융을 맡았는데 호텔과 패션을 맡고 있는 여동생들을 제치고 후계구도를 낙점지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현재 경영에 참가하고 있는 재벌가 딸들의 사업 진출 영역은 유통과 패션 등 그룹 주력 계열사에선 빗겨난 경우가 많다.

딸들의 활약에 일각에선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보이지 않는 벽)이 깨졌다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최근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에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과 박성경 이랜드그룹 부사장을 선정했다. 국내 여성 기업인들이 세계적 활약을 펼치곤 있지만 결국 이 사장과 박 부사장 역시 ‘오너가’라는 점에서 국내 여성 기업인들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 ‘장자 승계’가 보편화된 국내에서 여성이 기업을 물려받으려면 남성보다 더한 활약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도 안고 있다.

이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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