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은 ‘사촌경영’ … 경영권 이양 순조로우나 계열분리 활발

LSㆍGS, 가풍 통해 집단적 지도체제로 기업 이끌어

두산, 4세대까지 이어진 회장직 승계

SK, 창업주 형제 후손들이 기업 이끄는 중

공평한 지분 분배ㆍ집안 간 합의가 중요

지난 7일,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구태회 명예회장은 평회ㆍ두회 두 동생들과 함께 LS그룹에 ‘사촌경영’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창업주들의 정신을 본받아 범 LS그룹은 현재까지 사촌경영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사촌경영, 이른바 ‘집단적 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은 범 LG가인 LS그룹, GS그룹을 포함해 두산그룹, SK그룹 등이 있다. 가문의 남자 형제들이 서로 엇비슷한 지분을 갖고 기업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지분 매각 등 경영 과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가족 회의를 통해 해결한다는 전통도 갖고 있다.

삼성, 현대, 롯데, 금호아시아나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경영권 분쟁을 겪으며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배에서 나온 형제들 또한 지분 싸움에 한창인데 서로 돌아가면서 회장직을 수행하는 집단적 지도 체제는 어찌 보면 상당히 이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능력 검증 없이 손쉽게 많은 집안 구성원이 경영에 참가한다는 점에선 국내 기업의 한계를 보여준다.

사촌 넘어 팔촌까지 이어지는 LSㆍGS가

LG가에서 독립한 LS와 GS는 사촌 경영을 정착시킨 대표적 대기업이다.

LS그룹은 지난 2003년 LG그룹에서 독립했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세 동생인 구태회, 평회, 두회 명예회장 일가가 독립해 LS그룹의 토대를 세웠다. LS그룹은 LG로부터 독립할 때 LS전선, LS산전, LS니꼬동제련, LS엠트론, E1, 예스코 등을 분할 받았다. 지주회사인 LS 산하에 LS전선, LS산전, LS니꼬동제련, LS엠트론을 사촌 간 공동체제로 운영한다. 예스코는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과 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 집안이 분할하고 있고 E1은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자손들이 맡고 있다.

지주사인 LS의 최대 주주는 구자열 LS그룹 회장으로 총 2.5%의 지분을 갖고 있다. LS그룹의 초대 회장은 고 구태회 명예회장의 아들 구자홍 회장이었는데 지난 2013년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열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다.

LS그룹은 기업의 토대를 세울 때 구태회, 평회, 두회 3형제 일가가 각각 4:4:2의 지분을 나눴다. 현재까지도 이 지분 비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만약 이 지분을 외부에 매각하려면 가족 회의를 거쳐야 한다.

역시 범 LG가인 GS그룹 또한 사촌경영 체제를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GS그룹은 지난 2004년 LG로부터 분가했다. 고 허만정 창업주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지분을 골고루 나눠가졌다.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GS의 최대 주주는 허창수 회장으로 4.75%를 갖고 있다.

GS그룹은 허만정 창업주의 아들들 중 삼남 허준구 고 LS전선 명예회장 일가가 GS그룹을 이끌고 있다. 현재 GS그룹의 회장은 허준구 명예회장의 장남 허창수 회장이다. 차남 허정수 GS네오텍 회장, 삼남 허진수 GS칼텍스 대표이사 부회장, 사남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오남 허태수 GS홈쇼핑 부회장 또한 경영 일선에 몸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허창수 회장의 사촌형제인 허동수 전 GS칼텍스 회장, 허연수 GS리테일 사장,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 등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사촌끼리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잡음이 없다는 것은 GS그룹의 특징이다. 40년 동안 국내 정유업계에 몸담아 오면서 ‘미스터 오일’이라 불렸던 허동수 전 GS칼텍스 회장은 지난 2월 이사회 의장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 사촌동생인 허진수 부회장에게 이사회 의장 자리를 물려줬다. 이로써 GS칼텍스는 허동수 전 회장과 허진수 부회장 양대 체제에서 허진수 부회장이 단독으로 이끌게 됐다.

4세대 등장한 두산, 2세대 복귀한 SK

두산 역시 사촌경영의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이 두산그룹 회장직에 오르며 대기업 최초 4세 경영 시대의 문을 열었다.

두산그룹은 고 박승직 창업주의 아들인 고 박두병 초대 회장의 아들들이 순서대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사촌경영 체제를 이어 왔다. 박두병 초대 회장의 뒤를 이어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 고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현 연강재단 이사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차례로 회장직에 올랐다. ‘용’ 돌림자를 쓰는 세대들이 퇴임 후 ‘원’ 돌림자를 쓰는 박정원 회장이 취임하면서 4세 경영의 막이 올랐다. 박정원 회장은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원칙적으로 사촌경영을 통해 가족간 화목을 중시해 온 두산이지만 한 차례 내홍을 겪은 바 있다.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은 1997년 차남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겼다. 그 후 박용오 회장이 2004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하다 2005년 3남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되자 비리 내용이 담긴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이로 인해 박용오 회장은 가문에서 제명당했으며 그의 아들들 역시 경영권을 이어받을 수 없게 됐다.

재계 순위 2위인 SK그룹도 사촌경영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고 최종건 창업주의 차남과 삼남인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과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 최종현 선대회장의 장남과 차남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부회장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공식적인 SK그룹의 후계자는 최태원 회장이다. SK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인 ㈜SK 지분을 살펴보면 최태원 회장이 23.40%, 최기원 회장이 7.46%, 최신원 회장이 0.01%를 보유하고 있다.

최종건 창업주가 1973년 타계한 후 동생 최종현 선대회장이 SK그룹을 이끌었다. 1998년 최종현 선대회장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최태원 회장이 그룹을 물려 받았다. 최종건 창업주의 자손들 또한 경영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안정적 승계를 위해 최태원 회장에게 경영권과 지분을 몰아줬다. 이 과정에서 다른 형제들은 상속 지분을 포기했다.

잠시 부침을 겪기도 했던 SK그룹 2세대들은 올해부터 본격적인 경영 일선 복귀에 나서고 있다. 지난 3월, 주주총회 후 최태원 회장은 등기이사 자리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도 지난 4월, 17년만에 SK네트웍스 회장 자리로 복귀했다.

눈에 띄는 후계자는 누구?

사촌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LS그룹은 아직 2세들이 현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고한 고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을 제외하곤 7인의 사촌형제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눈에 띄는 3세대로는 고 구자명 회장의 아들인 구본혁 LS니꼬동제련 전무가 있다. 구자엽 LS 산전 회장의 아들인 구본규 LS산전 전무도 주목받고 있다.

LS그룹과 마찬가지로 범 LG가에서 독립한 GS그룹은 아직까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사촌 경영 체제가 완전히 확립됐다곤 볼 수 없다. 형제들이 모두 비슷한 지분을 가진 만큼 GS그룹의 후계 구도는 아직까지 안갯 속이다. 일단 현재 GS그룹 회장에 올라 있는 허창수 회장의 뒤를 이을 사람으론 허완구 승산그룹 회장의 아들인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이 유력 후보로 꼽힌다.

그러나 GS그룹 역시 4세대의 등장으로 세대 교체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 3월, 허동수 GS 칼텍스 회장이 사내이사에서 제외됐고 허 회장의 장남 허세홍 부사장이 등기이사로 새로 선임됐다. 허 부사장은 GS그룹 4세 중에선 최초로 등기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GS그룹 4세 중에선 허세홍 부사장 말고도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아들 허윤홍 GS건설 전무 또한 주목해 볼 만한 후계자이다. 허윤홍 전무는 2016년 임원인사에서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가문의 장손인 허준홍 GS칼텍스 전무 또한 유력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다. 허준홍 전무는 허정구 명예회장의 장님인 허남각 삼양통상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GS그룹은 장자승계 원칙을 갖고 있다. 만약 장자승계 원칙을 따른다면 허만정-허정구-허남각-허준홍으로 경영권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GS그룹 계열분리 과정에서 허정구 회장의 삼남인 허준구 회장 일가가 큰 공헌을 했다. 이에 따라 현재 허준구 회장의 다섯 아들들이 그룹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사촌형제가 모두 경영에 참가하고 있지만, 타 기업에 비해 사촌경영의 역사가 짧은 SK그룹은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아들들의 계열분리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SK건설 주식 156만9326주(지분 4.45%) 모두를 매도했다. 일각에선 최창원 부회장이 SK케미칼을 SK그룹에서 분리해 내기 위한 계열분리를 위해 SK건설 주식을 이용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최 부회장은 매각한 SK건설 주식을 SK케미칼 지분을 확보하는 데 쓸 것으로 예상된다. 최창원 부회장은 SK케미칼 지분을 15.28% 보유하고 있다.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대주주이지만 향후 계열분리를 위해선 더 많은 지분의 확보가 필요한데 SK건설 지분 매각을 통해 케미칼 지분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최 부회장의 행보가 계열분리를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이다.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과 최창원 SK케미칼 형제는 SK그룹의 토대가 되는 계열사들을 맡고 있다. SK네트웍스의 모태는 창업주이자 형제의 아버지인 최종건 회장이 일군 선경직물이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에 이어 SK케미칼의 전신인 선경합섬을 설립했다. 그룹의 모태가 되는 계열사이니만큼 형제가 차차 지분을 늘려 SK로부터 독립할 것이라는 전망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 동안은 최태원 회장이 수감 중이어서 계열분리를 논하는 것이 시기 상조였지만 현재 시점에선 최 회장이 석방됐고 SK그룹 등기이사직에도 복귀했기 때문에 차차 최종건 창업주 일가의 계열분리를 준비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오가고 있다.

공평한 지분 분배가 사촌경영의 핵심

형제 사이에서도 경영권 분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국내 기업에서 사촌경영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기업들은 타 기업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질 때마다 주목을 받는다. 형제들에 비해 유대감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생각보다 별 잡음 없이 경영권 이양이 이뤄지고 있다.

이는 창업주의 정신에 기반한다. 사촌 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LS그룹은 구태회, 평회, 두회 삼형제가 LG그룹에서 분리할 당시 사이 좋은 사촌 경영을 약속했다. 1세대의 약속에 따라 2세대에게도 그 전통은 전해졌다. LS그룹은 매달 첫째 주 금요일마다 구자홍 회장, 구자열 회장 등을 포함한 8명의 사촌형제가 모여 전반적 경영 사안을 토론하는 ‘8인회’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또 65세를 전후로 현직에서 은퇴한다는 암묵적인 룰도 갖고 있다.

그러나 가문의 전통을 따른다는 이상론 보단 분열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 필요하다. 분쟁 없이 원활한 경영을 하기 위해선 지분을 독식하는 사람 없이 골고루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특히 지분 소유에 관해선 민감할 수 밖에 없는데 가문에서 정한 ‘룰’을 구성원들이 깨는 순간 ‘사촌 형제의 난’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창업주를 거쳐 그의 증손자대까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가운데, 갈수록 경영에 참가하는 남자 후손은 늘어가고 있다. 향후 대기업의 계열분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또한 각자의 몫을 확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진다. 삼성그룹 역시 이건희 회장들의 형제들이 계열분리를 통해 신세계, 한솔 등을 탄생시켰다.

한편 사촌 경영이 자리를 잡은 기업들은 철저한 장자승계를 따르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장자를 중심으로 가문의 남자 후손들은 요직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남자 후손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가운데 여성 구성원의 활약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두산그룹의 경우 이번에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4세대 박정원 회장의 여동생인 두산매거진 박혜원 부사장이 직책을 맡고 있다. GS그룹의 경우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의 여동생 허인영 ㈜승산 대표이사가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잡음 없이 경영권을 승계한다곤 하지만 능력 검증 없이 직급을 받는 것에 대해선 비난 여론도 높다. 최소한의 능력 검증 장치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김우진 교수는 “가문의 구성원이 지분을 얻는 것과 회사에서 직책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업 지분의 보유와 경영 일선 참여를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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