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마트 상생 협약 어겨…뒤늦은 문구 판매 규제, 8월까지 지켜봐야

지난해 문구류 판매,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오는 8월부터 대형 마트 묶음 상품 판매 시작

홈플러스, 신학기 프로모션으로 중소 문구점 울려

대형 마트, 향후 상생 협약 지킬지 지켜봐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학교 앞 문방구는 등교 시간엔 준비물을 사기 위해, 하교 시간엔 장난감부터 군것질거리를 사며 삼삼오오 모여드는 아이들로 늘 붐볐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동네 아이들의 모임 장소였던 작은 문방구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중소 문구점들의 몰락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교육 정책이 바뀌며 학생들이 직접 소량 구매를 하는 것보다 학교나 지방자치단체의 대량 구매가 늘어난 것 또한 주요 원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대기업들의 골목 상권 침해는 빠지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동반성장위원회는 문구 판매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 유통 대기업들과 상생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키지 않는 일부 대형마트들 때문에 중소 문구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속앓이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어긴 대형마트의 ‘상생 협약’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기준 전국 문구점 점포는 5년 전보다 21.4% 줄어드는 등 급격한 감소세를 유지해 왔다. 업계는 매년 1000여개의 동네 문구점이 문을 닫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골목 문구점들의 절규가 이어지자 동반성장위원회는 지난해 9월, 문구소매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대형마트는 종합장, 연습장, 일반연필, 문구용품, 유성매직, 네임펜, 일반색종이, 스케치북, 형광펜, 교과노트(전과목), 알림장, 일기장, 받아쓰기, 색연필 세트, 사인펜 세트, 물감, 크레파스(크레용 포함) 등 초등학생용 학용문구 18개 품목을 묶음 단위로 판매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신학기 등 문구용품 판매가 늘어나는 기간에 할인 프로모션을 할 수 없게 됐다.

당시 안충영 동반위원장은 “문구류는 가장 시간을 길게 끌고 협의를 오래한 품목”이라며 “대형마트에서 파는 문구 품목 수를 제한하는 것은 시장에 대한 지나친 개입이지만 매출 규모를 축소하자는 기본 원칙에는 합의했다”고 말한 바 있다.

상생 협약에 따르면 대형마트는 초등학생용 학용문구 18개 품목을 묶음으로 판매하는 것과 함께 신학기 프로모션 등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시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홈플러스는 올 2월부터 3월까지 전국 141개 점포에서 ‘신학기 용품 대전’을 열었다. 당시 홈플러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신학기 필수품인 문구용품 270여 종을 저렴하게 준비했다고 밝혔다. 할인 판매 대상에는 캐릭터 스케치북 6개 묶음 세트동아 토루 사인펜(12색)ㆍ스누피 샤프식 색연필(12색) 등 사인펜과 색연필 10종 등 초등학교 준비물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에 대해 문구업계는 즉각적으로 항의에 나섰다. 동반위 측은 일단 홈플러스 측에 주의를 주겠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문구 업계 입장에선 영 찜찜한 대응 방법이었다.

동반위가 대형 마트와 협의한 상생 협약의 핵심은 초등학생용 준비물 문구류를 낱개로 파는 것을 금지하고 묶음으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묶음 판매 규제의 경우 재고 처리 때문에 유예 기간을 거친 후 올해 8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전국학용문구협동조합 방기홍 이사장은 “우리 문구 업계는 대형마트에 문구 공급을 하는 도매 업체들이 하루 아침에 거래처를 잃게 된다면 또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유예기간을 제의했다”고 설명했다.

문구 업계는 오는 8월부터 대형마트가 상생 협약을 잘 지키는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신학기 프로모션 금지 약속을 어긴 홈플러스처럼, 묶음 규제를 잘 지키는 지 아닌지는 뚜껑을 열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대형 마트들은 어떨까. 롯데마트의 경우 전단지나 광고에 문구류 할인 등을 기재하지 않고 있다고 밝혀왔다. 기본적으로 동반성장위원회가 정한 상생 협약을 지키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동반위의 권고 사항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까지 시작되지도 않은 상생 협약

물론 지금 현재 중소 문구점들이 처한 위기는 대형 마트들만이 책임져야 할 사항은 아니다. 대형마트 외에도 알파, 모닝글로리 등 문구전문 프렌차이즈나 다이소와 같은 생활용품 전문매장에서도 문구류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교육청이 ‘준비물 없는 학교’를 시행하면서 학교 차원에서 준비물을 제공해 학생들이 매일 아침 등굣길마다 학습 준비물을 구매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 또한 중소 문구점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방 이사장은 “사실 문구업계의 몰락은 이미 10년전부터 시작돼 온 오래된 문제”라 지적했다.

문구전문 프렌차이즈는 대형마트의 규제로 가장 큰 반사 이익을 얻을 만한 곳으로 예상돼 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업계 관계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문구전문 프렌차이즈 관계자는 “문구 프렌차이즈의 경우 유통도 하지만 문구류를 제조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대형마트의 문구 판매 규제로 반사 이익을 누리는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전국‘을’살리기비상대책위원회 이동주 실장은 “문구 프렌차이즈들은 여러 가맹점들을 운영하고 있고 그 가맹점 사장님들 또한 중소 자영업자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규제의 칼날을 엄히 들이대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도 대형마트의 판매 규제가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다만 이미 문구점의 몰락이 시작된 시점에서 최소한의 규제라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 종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홈플러스가 왜 시작과 동시에 협약을 어겼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국내 대형마트 중 이마트와 롯데마트는 신세계와 롯데 그룹 계열사로서 만약 문구 판매 협약을 어길 경우 오너가에게도 이미지 실추의 영향이 미칠 수 있다. 특히 골목상권 침해는 국내 재벌들의 아킬레스 건이다. 이미 오너가들은 지난 2008년 빵집 프렌차이즈 확장으로 인해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그러나 외국계 회사인 홈플러스의 경우 사회적 시선에서 더 자유롭기 때문에 협약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특히 현장에서는 외국계 회사들의 골목상권 침해는 국내 대기업들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전국 ‘을’살리기비상대책위원회 등은 중소기업적합업종 특별법을 통과시켜 현재 권고 및 경고에 그치는 상생업종 위반에 대해 좀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대형마트 역시 문구 판매 규제가 반가운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과정에서 몇몇 대형마트 관계자들은 “문구류를 상생 업종으로 받아줘 판매 규제를 이행한다면 이 다음에는 또 어떤 종류의 물건에 대해 판매 제한이 들어올지 모른다”며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대형마트 입장에선 문구류 판매 규제가 들어오더라도 영업 실적에 큰 지장을 받진 않는다. 그러나 문구류 외에도 중소기업 상생 협약으로 팔 수 없는 품목군이 확대된다면 차차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자생의 길 찾아야 하는 중소 문구점들

문구업계는 아직까지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 6월 1일, 전국학용문구협동조합은 민주노총, 전국유통상인연합회와 함께 상생 협약을 맺었다. 이 세 단체는 “재벌들의 눈 뜨고 보기 힘든 갑질에 맞서 연대에 나선다”고 협약의 취지를 밝혔다. 차차 협약의 범위를 늘려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 첫 번째 단계로 생계형 자영업 중 가장 폐업률이 높은 문구 소매업이 처음으로 꼽힌 것이다.

중소 문구점들은 지역별로 협동조합을 맺은 후 인터넷 쇼핑몰 운영을 통해 대규모 거래를 할 수 있는 이른바 B2B(기업 간 거래) 서비스를 시행할 계획이다. 중소 문구점들은 세금 계산서를 발행할 수 없어 대규모로 문구를 구입하는 학교나 지방자치단체와 거래를 할 수 없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협동조합 결성을 통해 세금 계산서 발행이 가능해지면 도매급 거래가 성사될 수 있어 중소 문구점들의 숨통이 어느정도 트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 적합업종 상생법의 규제가 강제성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선 중소 문구점들은 자생 노력과 함께 대형마트의 아량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구업계 관계자는 “문구점들 또한 살길을 찾아야 하지만 현재로선 대형 마트가 상생 협약을 스스로 지켜주기만을 바랄 뿐이다”라고 밝혔다.

이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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