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도용 피해자에 사기대출 방조 주장

현대캐피탈, 도용된 신분증으로 만들어진 휴대전화ㆍ계좌ㆍ공인인증서에 속수무책 대출실행

명의도용 및 사기대출 피해자에 “명의도용 방조, 공동불법행위자 아닌가” 주장

피해자 아닌, 일부 제2금융권의 간편ㆍ신속 대출 심사가 불러온 사건 지적

한민철 기자

국내 대표적 제2금융업체 현대캐피탈이 명의도용으로 인한 사기대출의 피해자를 공범으로 몰아 그에게 채무를 지우려 했던 사연이 밝혀졌다. 현대캐피탈은 자신들도 사기행위로 인해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며, 명의를 도용당한 이가 사실상 사기대출을 방조해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소송전으로 이어진 이 사건에서 법원의 판단은 현대캐피탈의 입장과 정반대였다. 특히 이번 사건이 캐피탈사가 강조하는 ‘간편·신속 대출심사’의 문제점에서 발생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건은 지난해 2월 경상남도에 위치한 한 어학원 원장 A씨와 이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던 B씨 사이에서 비롯됐다.

당시 A씨는 성범죄 이력 조회를 위해 필요하다며, B씨로부터 그의 신분증을 건네 받았다. 학원에서는 강사 채용이 이뤄질 때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채용 예정자의 성범죄 경력을 확인할 의무가 있는 만큼, B씨는 별다른 의심이 없이 자신의 신분증을 A씨에게 건넨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A씨는 B씨의 신분증을 도용해 같은 달 15일 B씨 명의의 가입신청서를 허위로 작성해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원장인 A씨의 개인정보 악용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B씨의 신분증으로 거래신청서까지 작성해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가 하면, 이 은행으로부터 B씨 명의 공인인증서까지 발급받았다.

A씨가 B씨의 신분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은 휴대전화 개통과 은행 계좌 개설, 공인인증서 발급이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을 바로 B씨 명의를 도용한 대출이었다.

A씨는 B씨 명의의 휴대전화와 은행 계좌, 공인인증서를 악용해 2016년 3월부터 4월까지 현대캐피탈을 포함한 3개의 금융업체에서 총 3500만원의 사기 대출을 했다.

공교롭게도 B씨는 자신의 명의로 거액의 대출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

이들 금융업체들이 A씨의 대출 실행 후 원리금 상환 신청에 들어가자 A씨가 B씨 명의로 개설했던 통장에 잔고가 없어 연체가 됐고, B씨와 직접 연락을 취하며 사기대출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B씨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해당 금융업체에 B씨가 신청하지도 않은 대출이 어떻게 그의 명의로 이뤄졌는지 경위를 파악해 결국 A씨의 범행 전말이 드러나게 됐다.

결국 A씨는 재판에 넘겨졌고, 사기와 사문서위조, 사전자기록등위작 등의 혐의로 지난해 9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판결을 받고, 형이 확정됐다.

향후 문제는 사기대출로 인한 이들 금융업체들의 피해 보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모아졌다.

B씨는 자신이 A씨의 명의도용을 통한 대출로 인해 사기피해를 당한 당사자로서 현대캐피탈 등 금융업체에 그 어떠한 채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금융업체들은 B씨가 명의 도용을 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B씨는 현대캐피탈 등 A씨가 사기 대출을 실행한 3개 금융업체를 상대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채무가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중 한 업체는 B씨의 주장에 대해 그가 자신들에게 질 채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현대캐피탈 등은 달랐다. B씨가 A씨와 공모해 해당 대출을 실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구체적으로 법원을 통해 밝혀진 현대캐피탈 측의 당시 주장에 따르면, 휴대전화와 공인인증서 명의가 B씨였다는 것을 자신들이 확인했고 대출 계약이 체결된 뒤 B씨 명의 계좌에 대출금을 송금했기 때문에 이 계약의 채무자는 B씨라는 것이다.

B씨는 A씨가 자신의 신분증을 도용해 대출을 실행하기까지 전 과정에서 불법 행위가 벌어졌다고 주장할지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던 현대캐피탈의 입장에서는 A씨가 B씨 명의로 된 휴대전화와 공인인증서, 은행 계좌를 보유한 채 대출 계약을 실행한 만큼 A씨가 B씨를 대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현대캐피탈 측은 민법 제126조에 명시된 표현대리의 법리에 따라 대출계약은 B씨에게 효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 B씨가 A씨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할지라도, 현대캐피탈 역시 A씨의 사기 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이에 대한 책임은 A씨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의가 도용돼 대출이 발생할 때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B씨에게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현대캐피탈 측은 “대출계약의 효력이 B씨에게 미치지 않더라도, A씨의 불법행위로 현대캐피탈은 대출금 상당의 손해를 입게 됐다”라며 “B씨는 이를 방조했으므로 공동불법행위자로서 그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대캐피탈도 A씨의 불법 대출로 인해 금전적 피해를 입게 됐지만, 명의를 도용당해 사기 피해를 당한 이를 사기 행위의 공범으로 몰아간 이번 일은 소송 당사자에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법원은 B씨가 현대캐피탈 등을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 소송에서 B씨의 손을 들어줬다.

A씨로 인해 이뤄진 B씨 명의의 대출계약이 관련 서류를 위조해 받은 휴대전화와 은행 계좌, 공인인증서를 도용해 현대캐피탈 등과 체결된 것으로 그 효력이 B씨에게까지 미칠 수 없다는 판단이다.

특히 B씨가 A씨와의 공모관계라는 현대캐피탈 측의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A씨가 B씨를 대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은 명백했고, 현대캐피탈 측이 제시한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기본대리권에 근거하는 만큼 해당 법률을 이번 사건에 적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현대캐피탈이 B씨에 주장한 A씨의 불법행위 방조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원고(B씨)가 A씨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고, 원고는 A씨에 성범죄 조회를 위해 신분증을 빌려줬다가 자신의 명의로 서류가 위조됐고 대출 피해를 입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현대캐피탈 측의 적반하장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B씨가 자신의 명의가 A씨로부터 도용돼 사기대출이 실행될 때까지 인지하고 있지 못한 것이 방조이자 공범으로 의심했다는 점은 오로지 사익만을 추구하는 업체의 지나친 이기심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B씨가 자신의 명의가 도용됐다는 인지하지 못했다는 탓을 하기 전에 현대캐피탈 측이 먼저 대출심사를 다른 1금융권 측보다 더욱 철저히 했다면 이런 사기대출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현대캐피탈 등 다수의 제2금융권이 강조하는 신용대출에 있어 ‘간편·신속 대출심사’가 ‘부실한 심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될 전망이다.

한민철 기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