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혁신 바람, 재계 미래 개척하는 모습 보여야…재벌 3ㆍ4세, 능력 없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1,2세보다 약해진 리더십, 3세들, 지분율로 오너십 유지하려 해”

“이제 재벌 3ㆍ4세는 없다…선대와 달라야 살아남아”

“재벌은 서서히 이완 중…전경련 규모 축소, 재벌 해체 신호탄”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최근 3~4년 사이에 재벌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며 "오너가의 젊은 세대로서 기업에 혁신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키거나 참신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벌 개혁에 속도가 붙는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재벌개혁을 핵심 경제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취임 이후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갔다. 정부 내부에서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인사들은 드물었다.

이랬던 문 대통령이 미국에서 재벌개혁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지난 20일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한 문 대통령은 미국 금융·경제인과의 대화에서 “이제는 재벌 체제가 그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이다.

문 대통령은 한 참석자의 재벌개혁에 대한 질문에 “한국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은 고성장을 이끌어왔다. 앞으로도 한국 성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답하면서 “다만 한국 재벌 체제로 인해 경제가 불투명, 불공정한 측면이 있다, 이런 부분들을 해결해야 높이 성장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재벌개혁이 재벌 해체나 소유·경영권을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벌의 경쟁력을 높여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한 번 재벌 개혁에 대한 의지를 밝힌 셈이다.

현재 재벌은 창업주와 2세를 지나 3,4세로 경영권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벌 개혁의 당사자가 바로 재벌 3,4세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대내외적인 환경은 선대가 겪었던 것과는 180도 다르다.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은 지속되고 있고 국내 상황도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재벌을 바라보는 여론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재벌 3,4세들은 현재의 난관을 뚫고 앞선 세대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을까. <주간한국>은 창간 53주년을 기념해 재벌 문제를 20여 년간 연구해 온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의 생각을 들어봤다. 정 대표가 생각하는 재벌 3,4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일까. 다음은 일문일답.

-재벌 3,4세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최근 3~4년 사이에 재벌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3세가 갖고 있는 경영 색깔을 확인할 수 있는 게 없다.”

-색깔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경영을 이끌어가는 오너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에 기업에 혁신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키거나 참신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없이 전통적으로 선친들이 해 오던 사업을 수성하고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수성도 되지 않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1, 2세에서 3세로 넘어갔을 때에는 보다 젊고 참신한 후계자들이 기업을 넘어서 재계의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진취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3,4세들이 갖고 있는 특성과 환경이 다른데 소극적인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대내외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경영권이 3세로 넘어가는 시점이 좋지 않았다. 2008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3세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경영권을 이어받거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3,4세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때다. 더불어 국내경기도 위축됐다. 세계 경제와 국내 경제가 상당히 침체돼있는 상황에서 경영권을 넘겨 받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조차 못 가진 케이스들이 많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 방어적인 경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외부 요인만으로 3,4세가 색깔을 내지 못한 것인가.

“내부적 상황도 한 몫 했다. 창업주에서 2세로 경영권이 승계될 때와 2세에서 3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기업 내부 환경이 달라졌다. 과거 창업주의 카리스마는 막강했다. 창업주의 권위에 눌려 회사 내부에서 어떤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런 창업주가 2세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상황이었다. 경영권과 함께 강력한 리더십도 넘겨준 셈이다. 그러나 2세가 3세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카리스마가 약화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3세들은 경영권은 넘겨받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은 승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한 마디로 조직 장악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부친인 재벌 2세와 부친과 함께 회사를 일군, 노회한 전문 경영인 사이에 껴 있는 샌드위치 신세가 3세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갖고 있는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여지도 많지 않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1.2세와는 달리 3.4세는 기업을 넘어서 재계의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더십 약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3세들의 태생적 요인에 기인한다. 창업세대와 2세의 성장환경은 3세와 상당히 다르다. 창업세대는 전후 50~60년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창업을 시도했다. 황무지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피와 땀으로 기업을 일궜다. 창업할 당시 나이대도 40~60대로 적지 않았다. 당연히 2세들의 나이도 청년 세대였다. 2세들은 창업주가 힘들게 기업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옆에 지켜보고 때로는 함께 일을 도왔다. 우리나라 재벌 1,2세들은 창업 동지에 가깝다. 자연스레 아버지의 경영 스타일 등 회사 경영의 모든 것을 옆에서 배울 수 있었다.

3세들은 다르다. 큰 부가 축적된 상태에서 태어난 3세들은 어려움을 없이 자라 대부분 유학을 간다. 그 이후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창업주의 손자라는 이유로 경영에 참여하는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이러한 코스가 리더십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3세는 2세가 창업주 옆에서 보고 배운 것과 같은 실전 경험이 없다. 그러다 보니 문제점들이 생긴다. 첫째, 기업가의 혁신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지 못한다. 혁신 정신은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위기 관리 능력이 떨어진다. 셋째, 결과적으로 회사 내에서 카리스마가 떨어진다. 단적으로 수십 년간 일생을 바친 직원들이 보기에 창업주 손자라고 들어온 3세들을 곱게 볼 수 있겠나. 특히 한국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 ‘금수저’의 대명사가 재벌 3세가 아닌가. 유학 갔다 온 후계자가 회사로 들어와 쉽게 승진하는 모습을 사회나 회사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창업주의 카리스마가 100이었다면 2세는 90은 유지하지만 3세는 30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역사의 흐름과 같다. 조선 태조와 고종을 비교했을 때 장악력이나 충성심이 같을 수 있겠나. 갈수록 카리스마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카리스마가 약해져도 여전히 오너가를 비롯한 3세들이 기업을 장악하고 있는 것 아닌가.

“카리스마, 리더십 약화는 조직 장악력 부족으로 귀결된다. 3세들은 이렇게 약화된 카리스마를 지분율로 만회하려고 하고 있다. 지분율마저 없으면 종이 호랑이 신세이기 때문이다. 3세들은 지분율을 통한 오너십(ownership)을 놓지 않으려 더욱 지분 매입에 몰입하고 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은 결코 현재 이재용 부회장보다 지분이 높지 않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벌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물론 재벌이 우리나라 경제에 독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압축 성장을 이끌어 온 것이 재벌 대기업이고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문제점이 생겼다. 국가 경제는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가 10%의 파이를 가져가면 누군가는 10%를 뺏기는, 약탈 경제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약탈 경제 구조는 갈수록 심화됐고 시장 지배력이 날로 높아진 재벌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됐다.

경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1998년 IMF 위기에 존재했다. 당시 정부는 재벌은 재벌대로 성장하게 하고 새로운 경제 주체들을 키우는 방식으로 경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실제로 코스닥 시장이 열리면서 많은 벤처기업들이 경제 주체로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코스닥 투자자 중 70%는 투기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벤처기업들은 상을 줘야 할 정도다. 벤처 투자 거품이 빠진 이후 타산지석 삼아 경제 구조를 바꿀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 관료들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만약 당시 재벌의 새로운 경영 툴(tool)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면 3세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제때 개혁을 하지 못한 사회적 책임도 있다.“

-녹록치 않은 대내외환경 속에서도 눈에 띄는 기업은.

“3세 중에 아직 전면에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답하기 어렵다. 그나마 CJ가 사업 구조의 틀을 시기적절하게 바꿨다. 식품사업과 함께 발전 가능성이 높은 문화 콘텐츠 사업 진출은 좋은 선택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CJ CGV다. 영화관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복합 레저시설로 변모시켰고, 자본을 투입해 한국형 블록버스터 탄생에도 기여했다. 투자로 인한 보상인 시장 지배력을 놓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으로 먹거리를 찾아 변화해야 한다.”

-재벌 3,4세의 앞날을 어떻게 보는가.

“이제 재벌 3,4세라는 것은 없다. 재벌이 서서히 이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재벌 해체의 신호탄이다. 전경련은 재벌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가당착성 조직이었다. 재벌 3,4세는 과거에 머물면 안 된다.”

-재벌 3,4세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

“우선 개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MS의 빌게이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 등 미국 경제를 이끌었고, 이끌고 있는 이들은 엄청난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달변가다. 경제 전문가조차도 이 사람들과 얘기하면 못 당해낸다. 과연 우리나라에는 이 정도 수준의 재벌이 있는지 묻고 있다. 보고 받은 내용을 외워서 말한다고 진짜 안다고 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는 재벌 구조에 대한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서서히 진행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경영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무거워졌다. 특히 경영상 잘못으로 주주들에게 피해가 닥쳤을 때 주주들의 저항권도 커질 것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횡령, 배임 등 회사에 피해를 끼치는 범죄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예전 같지 않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재벌의 비중이 높다보니 3,4세들에 의해서 좌우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 능력이 없다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미국은 그 과정을 이미 겪었다. 총수 일가가 경영하지 않으면 회사가 엉망이 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그랬다면 미국과 일본은 이미 망했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기업은 이제 오너가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지났다. 경영진이 있고 주주가 엄연히 존재한다. 더구나 갈수록 기업에 대한 감시망도 촘촘해지고 있다. 선대 회장들과 똑같은 마인드를 갖고 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정선섭 대표 약력

1960년 8월 2일생

중앙고등학교 졸업(1979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1986년)

경향신문 경제부 사회부 기자(1990년 2월~1999년 9월)

재벌닷컴 대표이사(2006년 5월~현재)

허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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