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사업 진출이 최고의 백미…신경영 선언으로 초일류 기업 거듭나

국내 최대 기업이자 세계 최고 정보기술(IT) 기업 중 하나인 삼성전자가 올해 1월 13일자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삼성전자는 아시아 변방의 보잘것없는 전자업체로 첫걸음을 내디딘 지 반세기 만에 반도체와 스마트폰 시장에서 세계 최대 기업으로 등극했다. 어떤 일류 기업이든 정상에 서기까지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결정적 순간들’을 되짚어본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전자산업 진출과 반도체 사업 본격화 과정에서 탁월한 선견지명과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삼성전자공업 설립으로 전자산업 진출

한국 재계의 1세대 기업인이자 국내 최대 대기업집단의 기틀을 다진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1986년 출간된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삼성전자를 설립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호암은 그의 아호(雅號)다.

“1960년대 후반의 전자산업을 보면, 구미(歐美)를 추적한 일본에서는 그 개화기를 맞고 있었고 대만은 바야흐로 그 도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손을 댄 기업도 있었으나, 외제 부품을 도입하여 그것을 조립하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뚜렷한 장기적인 비전이 없는 실정에 있었다. 품질도 조악했고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흑백 텔레비전 값도 웬만한 봉급생활자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수준이었다. 기술혁신과 대량생산에 의한 전자제품의 대중화는 아직 요원했다. 사업성을 검토해 본 결과,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 전망 등 어느 모로 보나 우리나라의 경제단계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삼성이 이 산업에 진출하여 국내에서 전자제품의 대중화를 촉진시키고, 아울러 수출전략상품으로 육성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 보자고 결심하였다.”

이병철 창업자는 매우 주도면밀하고 과단성 있는 기업인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사전에 국내외 정세와 시장 환경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하고, 사업 타당성이 검증되면 과감하게 의사결정을 내렸다. 그런 그에게 전자산업은 삼성그룹이 반드시 진출해야 하는 분야로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전후(戰後) 1950년대에 전자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지 불과 10여년 만에 서구 국가들과 경쟁하는 수준에 도달한 바 있다. 평소 이웃 일본의 경제 및 산업 동향을 주시해 왔던 이병철 창업자는 “기술만 도입하면 삼성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삼성그룹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려는 의지를 공식화하자 뜻밖의 사태가 펼쳐졌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면 한국 전자업계는 망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주로 기존 전자업체들의 반발이었지만, 국회의원까지 동원해 삼성의 발목을 잡는 일도 벌어졌다.

신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던 이병철 창업자는 고심 끝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는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면서 ‘국가적 사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진지하고 열띤 설명을 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산업 전반의 개방을 지시했다. 그렇게 이병철 창업자의 원대한 비전과 강력한 의지로 전자산업 진출이 성사됐고, 1969년 1월 13일 마침내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현 삼성전자)가 설립됐다.

삼성전자공업의 출범은 당시 국내 전자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금성사(현 LG전자)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갔다.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전자산업 진출은 그의 죽마고우이자 사돈이었던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와의 결별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후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서로를 뛰어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양사의 지속적인 경쟁과 대결은 결과적으로 한국이 세계 전자산업의 일등 반열에 오르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만약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여론에 굴복하고 우정에 연연했다면 삼성전자 설립은 무산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현재의 삼성전자는 없을 것이고, 삼성전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전자산업이나 IT산업의 판도도 사뭇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연합

▨‘도쿄 선언’으로 반도체 사업 본격화

반도체는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자 삼성전자의 핵심 캐시카우다. 특히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절대 강자의 아성을 쌓아 올렸다. 반도체 사업은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이병철 창업자는 오늘날 한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이끈 삼성전자의 초석을 놓은 주인공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고 육성하는 데도 그의 선견지명과 용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3년 3월 15일 이른 아침의 일이다. 당시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창업자는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결정을 알린다. “오늘을 기해 삼성은 VLSI(초고밀도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그의 결단은 곧바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른바 ‘도쿄 선언’이다.

이듬해인 1984년 5월 17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삼성반도체통신(훗날 삼성전자에 합병됨)의 VLSI 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서 이병철 창업자는 가슴 벅찬 인사말을 참석자들에게 전했다.

“삼성이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은 충분한 투자 여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오로지 반도체 산업을 성공시켜야만 한국의 첨단산업을 꽃피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삼성의 모든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이 사업의 추진을 결심했던 것이다.”

사실 삼성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74년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반도체는 반도체 웨이퍼 가공생산을 하는 회사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가 한국반도체 지분 인수에 자신의 사재를 투자할 만큼 반도체 사업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건희 당시 이사는 그 무렵을 전후해 세계 반도체 산업 동향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반도체 선진국 전문가들을 자주 만나며 지식을 축적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 관해 부자지간에 호흡이 척척 맞았던 셈이다.

삼성은 1978년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50% 지분을 인수했고, 회사 이름도 삼성반도체로 바꿨다. 이듬해에는 반도체 조립 회사 페어차일드의 부천 공장이 매물로 나오자 이를 인수했다. 하지만 삼성의 반도체 사업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반도체 가공과 조립만으로는 반도체 산업의 변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병철 창업자가 직접 VLSI 공장을 설립하고 반도체 설계, 개발, 생산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흥 반도체 공장이 준공된 1984년 무렵 세계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일본이 양분하고 있는 구도였다. 그들에게는 삼성의 도전이 가소롭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무서운 속도로 기술 수준을 끌어올려 나갔다.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 1986년 7월 1메가 D램 개발, 1987년 세계 반도체 업계 톱10 진입(9위), 1988년 반도체 사업 첫 흑자 실현에 이어 1992년 마침내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올라섰다. 반도체 산업 본격 진출을 선언한 지 고작 10년째 되던 해에 이뤄낸 기념비적인 성과다.

이후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줄곧 세계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후발주자가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선두주자의 위상을 확고히 굳힌 것이다. 아버지 이병철 창업자가 씨앗을 뿌리고, 아들 이건희 회장이 결실을 거둔 셈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전자를 글로벌 일류기업 반열에 올려놓았다.

▨‘신경영’ 앞세워 글로벌 기업 도약하다

1987년 11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타계하면서 그의 셋째 아들이 2대 회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건희 회장 취임 후에도 삼성의 외형적 성장은 계속됐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87년 2대 회장으로 취임한 후 ‘제2 창업’을 경영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선친의 시대와는 다른 삼성,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게 별로 없었다. 주력회사인 삼성전자가 만들어 판매하는 제품은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3류’ 취급을 받고 있던 터였다.

이건희 회장은 오랜 고민 끝에 삼성의 혁신을 위한 결단을 내렸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켐핀스키 호텔에 삼성의 핵심 경영진 200여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소집한 비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회의 장소에서 이건희 회장의 입을 쳐다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이건희 회장이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

이날 이건희 회장이 삼성 경영진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발언했던 내용들은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알려져 있다. 그 골자는 역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삼성의 모든 경영 관행을 혁신하고 개혁하자는 게 골자다. 이날 이건희 회장의 일갈은 삼성그룹 ‘신(新)경영’의 출발점이 됐다.

이건희 회장이 주창한 신경영의 요체는 품질 중시 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에 외형 확대 중심의 성장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품질 제고보다는 물량 확대에 초점을 맞추는 기업들이 많았다. 이건희 회장이 보기에 삼성그룹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회장은 삼성이 국내 일등 기업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반드시 일등 품질의 제품을 내놓을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신경영 문화를 삼성에 뿌리내리기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과정에서 삼성 임직원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하는 일들도 종종 시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무려 500억원어치의 전자제품을 불태워버린 ‘불량제품 화형식’ 사건을 들 수 있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는 2000여명의 직원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휴대폰, 무선전화기, 팩시밀리 등 15만대가 넘는 전자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직원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얼마 후 ‘의식’이 진행됐다. 500억원어치의 제품은 몽땅 해머로 부숴진 후에 불구덩이에서 잿더미로 변했다. 이는 삼성전자 임직원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이건희 회장이 의도한 극히 이례적인 충격요법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크고 작은 고비를 넘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임직원들의 의식도 점차 변해갔다. 무엇보다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의 수렁을 벗어난 2000년대 초반, 삼성전자는 세계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는 기업으로 거듭나 있었다. 메모리반도체 일등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휴대폰, 프리미엄 TV, 액정표시장치(LCD) 등의 시장에서도 거물로 도약했기 때문이다.

신경영 선언 10주년을 맞이하던 2003년을 전후해 세계 주요 언론매체들은 이건희 회장과 삼성전자를 비중 있게 다루는 사례가 잦아졌다. 2003년 11월 24일자 <뉴스위크(Newsweek)>는 이건희 회장을 표지 인물로 올리고 ‘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뉴스위크>의 표지 기사는 이건희 회장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지휘권을 물려받은 후 대담한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유행의 선도를 중시하고 현실 안주를 기피하는 삼성 문화 건설에 앞장서 왔다. 전문가들은 삼성의 활기찬 생명력은 책임감, 디자인, 품질관리를 개선한 그의 개혁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중략) 삼성의 부상(浮上)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이제 일본의 경제신문들도 삼성을 칭찬하기에 바쁘다. (중략) 현재 삼성은 한국 역사상 그 어떤 기업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삼성전자가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됐다. 2000년대 초중반 무렵만 해도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삼성전자는 단지 글로벌 기업 수준을 벗어나 세계 전자/정보기술 업계에서 명실상부한 리더로 평가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창하고 실천한 신경영의 DNA가 삼성전자를 끊임없는 혁신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 전시회 CES 2019에서 인공지능과 5세대 이동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래 라이프스타일 솔루션을 대거 공개했다.

<도표> 삼성전자 50년의 발자취

1969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1971 흑백 TV 파나마 수출

1972 내수용 흑백 TV 생산 개시

1974 세탁기/냉장고 생산 개시, 한국반도체 인수

1977 컬러 TV 수출 개시

1978 흑백 TV 400만대 생산(세계 최다 수량)

1980 에어컨 생산 개시, 삼성반도체와 합병

1983 PC 생산 개시

1984 삼성전자주식회사로 사명 변경, 매출액 1조원 돌파

1987 연구개발 목적의 삼성종합기술원 개원

1988 삼성반도체통신 흡수 합병

1991 휴대전화 개발

1992 세계 최초 64메가 D램 개발

1993 신경영 선포

1994 세계 최초 256메가 D램 개발

1997 세계 최초 30인치 TFT-LCD 개발

1998 세계 TFT-LCD 시장점유율 1위, 세계 최초 디지털TV 양산

2000 컬러 TV 누적 판매량 1억대 돌파

2001 디자인경영센터 설립

2002 세계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 1위

2003 일본 소니와의 제휴로 S-LCD 설립

2005 세계 최초 50나노급 16Gb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

2006 세계 TV 시장점유율 1위 달성

2009 세계 최초 40나노급 D램 개발

2010 세계 최대 전자회사 등극(매출액 기준), 갤럭시 스마트폰 출시

2012 세계 100대 브랜드 중 9위 차지

2013 세계 최초 3D V낸드플래시 메모리 양산

2014 갤럭시 노트 엣지, 기어S, 기어VR 출시

2015 10년 연속 세계 TV 시장 1위, 삼성페이 출시

2016 세계 최초 무풍에어컨 출시, IoT냉장고 출시

2017 차세대 TV ‘QLED’ 공개, 브랜드 가치 세계 6위



김윤현 기자 unyon21@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