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비메모리 반도체' 133조 투자

한국의 진정한 ‘반도체 초강국’ 진입을 위한 닻이 올랐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초격차’를 보이고 있는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공격적 투자에 나선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결단으로 해석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비메모리 반도체의 중요성이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그의 ‘진짜 실력’이 발휘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지난 1월10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삼성전자의 수원사업장을 방문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삼성전자 ‘출격’

삼성전자를 핵심으로 한 현재의 국내 반도체 기술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약 35%를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 외 약 65%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낮은 경쟁력을 띄는 게 사실이다. 반도체 강국으로 불리는 한국이라지만 실상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조금 작은 시장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IHS에 따르면 세계 비메모리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4%대에 머무른다.

이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가 신호탄을 쐈다. 지난 24일 비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 계획을 밝혔다.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달성을 목표로 133조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키로 했다. R&D 분야에 73조원, 최첨단 생산 인프라 구축에 60조원이 투입될 전망이다. 인프라와 기술력을 공유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디자인하우스(설계 서비스 기업) 등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생태계의 경쟁력 강화도 삼성전자의 구상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전문 인력 1만5000명에도 채용에 나선다. 이는 직접고용 규모다. R&D 및 시설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면 42만명 가량의 간접고용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인 까닭에 중소 팹리스 업체의 고충을 우려하는 시각도 따른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최대한 반도체 위탁생산 물량 기준을 완화해 관련 문제를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반도체 경기는 안 좋지만, 이제부터 진짜 실력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발표로 삼성전자는 당시 발언을 현실화하겠다는 각오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가전 부문 R&D 및 시설투자에 쓴 돈이 약 48조원이다. 그의 2.8배에 이르는 133조원을 앞으로 10여년간 비메모리 반도체에만 쏟겠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시장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가 크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이전부터 비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관심을 피력해 왔다. 지난 1월 30일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과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간담회를 가진 이 부회장은 “위기는 항상 있지만 그 이유를 밖에서 찾기보다, 지속적인 내부 혁신을 통해 헤쳐 나갈 것”이라며 “회사의 미래성장 동력으로서 비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 사업을 집중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당시에도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투자계획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 따르면 홍 원내대표와의 간담회 당시 삼성전자의 한 직원은 프리젠테이션에 나서서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삼성전자가 최근 발표에서 공식 선언한 내용과 일치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메모리를 비롯해 비메모리 반도체의 모든 사업 영역 세계 1위가 회사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보다 앞선 지난 2017년 삼성전자가 조직을 개편할 당시 시스템LSI 사업부의 파운드리팀을 '파운드리 사업부'로 따로 분리·신설한 것도 그 일환이다. 파운드리 사업부는 팀으로 구성됐을 당시 인력 규모가 1200명 수준이었지만, 독립사업부로 승격하면서 1만여명 규모의 조직으로 거듭났다.

그 결과 파운드리 사업부는 설립 채 2년도 안 돼 관련 시잠 점유율을 약 3배가량 높여 발전 가능성을 드러냈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2017년 말 6.72%에서 올해 1분기 말 기준 19.1%까지 확대됐다.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입지가 워낙 좁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IHS에 따르면 세계 비메모리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4%대에 머무른다. 미국이 약 60%로 세계 1위다. 이어 유럽 12.9%, 중국 5% 순이다. 그나마 중국과는 큰 차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2013년 3.1%에 불과했던 중국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현재 수준까지 올라 한국을 역전했다. 한국은 이 기간 6.3%에서 2.2%p 낮아졌다.

일각에선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출이 도전이 아닌 필수란 목소리도 나온다. 그동안 주력해 온 메모리 반도체는 가격 변동성이 큰 탓에 압도적 기술력을 갖춰도 항상 호실적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1분기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의 세계적 수요·가격 하락에 따른 어닝쇼크를 피하지 못했다. 결국 삼성전자도 수출품목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한 데 있어서도 그렇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빅데이터가 활성화될 수록 비메모리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을 넘어 중앙처리장치(CPU)처럼 정보를 해석·계산·처리하는 역할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비메모리 반도체는 새로운 수요처를 마련하게 됐다”며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개척은 반도체 기업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제2의 반도체 기적’을 내다보는 삼성전자의 경쟁 상대는 미국의 퀄컴과 인텔, 대만의 TSMC, 일본의 소니, 네덜란드의 NXP 등이 꼽힌다. 퀄컴은 5G 모뎀칩, 인텔은 CPU, TSMC는 파운드리, 소니는 이미지센서, NXP는 차량용 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1위다.

삼성이 주력할 비메모리 반도체 제품은 일단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차량용반도체 및 이미지센서 등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 중소 팹리스와의 상생협력을 통한 파운드리 성장도 목표로 제시한 까닭에 이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파운드리의 경우 삼성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미세’ 공정이 핵심이므로 전망이 특히 좋다. 당장 이달부터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기반의 7나노 제품을 출하한다.

정부, 미래먹거리로 ‘비메모리 반도체’ 선정

삼성전자의 이 같은 행보에 정부도 힘을 보탤 채비를 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른 시일 내에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대한 지원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해당 분야의 인재 육성 방안과 산학연 공동연구시설 구축, 설계 소프트웨어(SW)와 관련한 지원 방안 등 여러 사항을 담을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가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나선 것은 기업과의 동반성장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통해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국가 수출구조를 완화하고, 일자리 창출 실적도 끌어올릴 수 있다. 전언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성장이 가능한 분야, 해당 분야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기대되는 일자리 창출의 효과 등을 검토한 끝에 비메모리 반도체가 미래먹거리로 선정됐다.

정부는 이전부터 비메모리 반도체를 눈 여겨 봤다. 지난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주요 대기업 총수와 만난 자리에서 이 부회장과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당시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에게 “우리의 반도체 비메모리 진출은 어떤지”를 물었고, 이 부회장은 “기업이 성장하려면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 후 문 대통령은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을 주문했다. 지난달 19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며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을 높여 수출의 메모리 반도체 편중 현상을 완화하는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처럼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만큼 지원규모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이뤄질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적어도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공동으로 신청한 1조5000억원 규모의 차세대 반도체 R&D 사업 예비타당성 조사는 통과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기대 이상의 ‘통큰 지원’도 조심스레 점친다. 이는 전 정부가 마련했던 지원책보다는 후퇴할 수 없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다. 앞서 박근혜정부도 2017년 3월 이와 관련한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산업부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선도국 도약’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인재양성과 여러 분야의 기술 개발 지원을 목적으로 부문별 투자 계획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산업부는 그 시기 ▲비메모리 반도체의 3대(저전력·초경량·초고속) 유망 기술개발에 2210억원 ▲차량용 반도체 석사과정 신설 통한 인재 2880명 양성에 130억원 ▲미래 반도체 소재·공정 원천기술 개발 등에 258억원 등의 투자를 계획했다. 이밖에 비메모리 반도체의 설계와 생산 및 서비스체계 구축 및 관련 펀드를 조성하기 위한 2000억원 투자 등의 내용도 담았다.

주현웅 기자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