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일본 수출규제 힘든데…재계 "불확실성 더 높아져" 우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을 불러온 ‘국정농단’ 사건을 둘러싼 2년 반 동안의 법정 공방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8월 2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박근혜(67)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63)씨, `뇌물공여자’인 이재용(51) 삼성전자 부회장 모두 2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됐다. 하급심에서 엇갈렸던 주요 쟁점들에 대해 대법원이 최종적인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심 판결 중 무죄로 봤던 부분을 추가로 뇌물로 인정해 서울고법으로 파기 환송했다. 이 부회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2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최씨 딸 정유라(23)씨에 대한 승마지원 명목으로 제공된 말 세 마리 구입대금(34억1797만원)과 삼성이 최씨 조카인 장시호씨가 설립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낸 후원금(16억2800만원)을 모두 뇌물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파기환송은 대법원이 하급심에서 이뤄진 판결을 다시 다루라며 원심으로 돌려보내는 법률적 판단이다. 파기환송이 되면 ‘대법원이 한 법률상·사실상의 판단’에 구속되기 때문에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법원 취지대로 판단한다.

특히 대법원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말 세 마리에 대해 최씨에게 소유권까지 넘어간 것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부회장이 최씨로부터 말 소유권을 갖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받고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말 소유권 이전에 관한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의 1·2심과 최순실씨의 1·2심, 이 부회장의 1심은 말 소유 명의가 삼성전자라도 실질적 소유권은 최씨와 정씨에게 넘어갔다고 봤다. 하지만 이 부회장 2심은 “형식적인 말의 소유권은 삼성전자에게 있다”며 소유권 이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다른 쟁점이었던 ‘부정한 청탁’ 역시 실체가 인정됐고, 영재센터 후원금 16억여원도 제3자 뇌물죄로 봐야 한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은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가능하고 청탁의 대상인 직무행위의 내용이 구체적일 필요도 없다”며 “대통령의 포괄적 권한에 비춰보면 영재센터 후원금은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후원금을 제공했을 당시 삼성그룹에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경영권 승계 현안이 존재했고 이 부회장이 승계 작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 ‘묵시적 청탁’을 했다고 본 것이다.

말 3마리 34억·영재센터 16억 총 뇌물공여액 86억원 늘어

결과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은 다시 위기에 몰렸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1년여 간의 수감생활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대법원이 뇌물공여 액수를 높여놨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액은 총 86억원으로 늘어났다.

뇌물 공여액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이 부회장의 혐의 사실에서 ‘뇌물액’은 곧 ‘횡령액’과 연동되기 때문이다. 회사 돈으로 뇌물을 줬으니 뇌물액이 늘면 횡령액도 따라서 늘어난다. 뇌물공여죄에 비해 횡령죄는 형량이 무겁다. 횡령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이 부회장으로선 이번 대법원 판결로 뇌물공여액 뿐 아니라 횡령액도 86억원으로 크게 늘어나며 형량도 덩달아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의 재수감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이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형이 유지되려면 징역 6년형까지 가능하다. 재판부가 정상을 참작할 만한 이유가 있다며 ‘작량감경’을 선택할 경우, 절반인 3년형까지 줄일 수 있고 ‘징역 3년 이하’에 대해선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다. 실제 이 부회장을 풀어준 항소심 재판부도 작량감경을 통해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작량감경은 정상 참작의 사유가 있는 경우 재판부 재량으로 형을 감량하는 것을 말한다. 적극적인 뇌물 공여가 아니라, 최고 권력과 그 주변 실세들의 강요에 따른 수동적인 뇌물 공여로 기업의 자유 경영권을 침해 당했다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는 취지에서다.

이 부회장 측은 파기환송심에 전력을 쏟을 전망이다. 횡령액 전액을 이미 변제했다는 점, 이 부회장 개인과 삼성 자체는 어떤 특혜도 받은 게 없다는 점 등을 호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파기환송심은 대개 2주 안에 사건기록이 서울고법으로 내려가고, 원래 이 부회장 항소심을 맡았던 서울고법 13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패전담 재판부(1,3,4,6부) 가운데 한 곳에 배당된다.

이 부회장의 변호를 맡은 이인재 태평양 대표 변호사는 이날 “대통령의 요구에 따른 금품 지원에 대해 뇌물공여죄를 인정한 것은 다소 아쉽다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이 정유라에게 말을 지원한 것 등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이 승마 지원에 ‘수동적’으로 임한 점이 파기환송심에서 쟁점이 될 수 있다.

이 대표 변호사는 “형이 가장 무거운 재산국외도피죄와 뇌물 액수가 가장 큰 재단 관련 뇌물죄가 무죄로 확정된 점, 삼성이 어떠한 특혜를 받지 않았음을 인정한 점에서 이번 판결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산국외도피죄는 액수가 50억원이상일 때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하게 돼 있다.

그는 또 “말 자체를 뇌물로 인정한 것은 이미 원심에서도 말의 무상사용을 뇌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사안의 본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이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에서 별개 의견이 있었음을 상기해 달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은 이번 일로 많은 분들에 대해 실망과 심려를 끼치게 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 “국가경제 이바지하게 도움 부탁”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파기환송 결정이 내려지자 삼성전자는 큰 충격에 빠졌다. 2심이 무죄로 판단한 혐의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유죄를 인정해 재판을 다시 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대법원 선고가 끝난 후 바로 입장문을 발표해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며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불확실성이 커지는 경제 상황 속에서 삼성이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움과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삼성이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재계에선 이례적인 삼성의 입장 발표가 현재 삼성이 처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있다. 현재 삼성은 실적 악화, 일본의 수출 규제, 미중 무역 갈등 등 여러 악재에 시달리며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최근 3년간의 국정농단 재판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수사 등으로 주요 경영진 공백 사태가 이어지면서 내부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삼성은 대법원 판결로 또다시 ‘총수 부재’라는 대형 악재에 직면하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삼성은 3여년간 계속된 재판과 검찰수사와 압수수색으로 위축돼있는 데다 일본 수출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 경영 체제를 꾸리고, 이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 부회장의 경영 공백이 생길 경우 회사 차원의 위기 극복 노력이 동력을 잃고 좌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과 관계없이 이 부회장은 위기 극복을 위한 비상 경영 체제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주변에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본 수출 규제 문제가 불거진 이후 계속된 현장 경영 행보도 이어갈 방침이다. 다만 향후 재개될 재판에 총력 대응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이 부회장의 경영 행보에 차질이 불가피할 거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종혜 기자

■ 미중 무역전쟁·일본 수출 규제 힘든데…재계 "‘불확실성’높아져"우려

재계는 대법원의 판결 직후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미중 무역전쟁, 일본 수출규제, 반도체 실적 부진 등 대내외 악재 속에 이번 판결로 삼성과 한국 경제에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전경련은 논평에서 “대법원의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우리 산업의 핵심 부품 및 소재 등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산업경쟁력을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삼성이 시스템반도체, 바이오 등 차세대 미래사업 육성을 주도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며 “경영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적 행정적 배려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경총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이번 판결로 삼성의 경영활동이 위축되면 개별 기업을 넘어 한국 경제에 크나큰 악영향을 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사법부는 이런 부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주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번 판결이 삼성뿐 아니라 주요 대기업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대법원이 삼성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이 삼성 승계 작업 관련 묵시적 청탁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삼성이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한 16억2800만원도 뇌물이 맞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롯데그룹 뇌물수수 혐의와 SK그룹 뇌물요구 혐의도 유죄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대기업들의 자금 지원이 박 전 대통령을 통해 최순실씨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롯데그룹은 긴장하는 분위기다. 대법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일부 뇌물 혐의를 유죄로 다시 판단하면서 면세점 특허권 취득을 대가로 K스포츠재단에 70억 원의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신동빈 회장의 최종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 재판에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되면서 신 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 결과 또한 예측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유·무죄의 법리적 판단만 하는 법률심을 앞두고 있어 큰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신 회장은 이미 1,2심에서 뇌물이 인정됐기 때문에 더 나빠질 것이 없다”며 “3심인 법률심에서는 법리적으로만 다투기 때문에 양형 요소가 재판단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종혜 기자



이종혜 기자 hey33@hankooki.com